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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uffy moment Jun 23. 2021

산책길에 묻는 안부

해가 길어지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여름 저녁. 귀갓길에는 산책하는 강아지를 여럿 마주치게 된다. 입을 살짝 벌려 입꼬리가 올라간 얼굴을 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강아지들. 산책 줄을 잡고 있을 때는 줄 끝에 연결된 강아지의 등과 정수리만 보느라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평일에는 저녁의 밝은 조각이 귀해서 일몰 시간을 재차 확인하며 집으로 향하고는 했다. 여름은 산책 줄 끝에 연결된 태그 라이트 대신 붉고 푸르게 지는 저녁 빛에 의지한 산책을 욕심내게 되는 계절이니까. 이제는 저녁 산책을 기다리는 강아지가 없으니 굳이 귀가를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산책하기 좋은 저녁이라는 감상이 떠오르는 건 막을 수 없고 그러면 괜히 산책 없이 보내게 되는 저녁이 아쉽고, 별 것 아닌 이유로 산책을 미뤘던 저녁이 떠올라 미안해진다.


지하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아래층 할아버지를 만났다.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올라가 도어록을 눌렀는데 이중 잠금이 되어있었다. 문이 안 열리니 초인종을 눌렀는데 그 잠깐 사이에 나도 모르게 초인종 소리를 들은 강아지가 짖을까 봐 아차 싶어 숨을 참았다. 숨을 참고 어깨를 움츠린 채 잠깐. 문 밖으로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기다린 걸까. 익숙한 소리는 이미 머릿속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 집도 아래층 할아버지네도 강아지를 키우지 않는다. 아래 위층의 두 강아지는 모두 하얀색 말티즈였고 아파트 산책 중에 우연히 마주치면 서로 겁을 내며 다가가지 못했다. 그저 서로의 반려인 곁에 머물며 멀찍이 으르렁 거릴 뿐. 아래층 할아버지, 할머니와 다른 안부는 나눠 본 적이 없다. 산책 가는 길에 마주쳤을 때 건넨 인사는 자연스레 강아지에게로 돌아왔고 강아지 없이 마주치면 간단한 목례로 끝나고는 했다. 스몰토크에 소질은 없지만 강아지 이야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입을 뗄 수 있었다.


강아지가 밖에 나가자고 하지 않는 이상 굳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집순이여서 강아지 산책할 일이 없어지자 자연스레 이웃과 마주칠 일이 줄어들었다. 오랜만에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아래층 할머니가 동생과 나를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어디 잠깐 나가서 살았냐고. 영문을 모르고 아니라고 하자 자주 못 본 것 같아서 따로 나가 사는 줄 알았다고 했다. 우리는 그냥 산책 메이트를 잃어서 집 밖으로 산책을 안 나갔을 뿐인데 너무 집에만 있었더니 집에 없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았다. 하얀 강아지 두 마리를 사이에 두고는 이웃과 제법 다정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사람만 덩그러니 남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괜히 강아지의 빈자리를 의식하게 된다.


강아지가 없으니 빈도는 많이 줄었지만 때때로 혼자 산책에 나선다. 멀리 갈 생각 없이 집 근처의 산책 코스를 골라 뜨거워진 햇빛과 나뭇잎 모양으로 생기는 그늘 아래를 번갈아 통과하며 걷는다. 혼자 걸었던 발자국과 강아지와 걸었던 발자국이 함께 남아 있는 길을 다시 걷는다. 이제는 내 발자국만이 더 여러 겹 쌓일 길을 걸으면서 흙먼지에 다리가 노랗게 되었던 강아지의 어느 때와 지치지도 않고 계단을 폴짝 뛰던 강아지의 하얀 등을 떠올린다. 그렇게 홀로 걷는 산책길에서 생기 넘치던 여름날의 강아지를 기억한다.




오늘은 부연이 있다.

요즘 출퇴근 길에 매일 듣는 노래 중 두 곡이 강아지와 관련된 노래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강아지 노래하면 어쩐지 가을방학의 눈물 나는 노래만 떠올렸는데 둘 다 너무 즐겁고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는 노래라 더 좋았다. (이렇게 즐겁게 강아지를 생각할 수 있어!! 의 무드에 빠지게 해주는 고마운 노래들)


heyden - let's play tug

소란 - 속삭여줘


heyden의 노래는 원래 리믹스 버전을 계속 플레이 리스트에 올려두고 있었는데, 유튜브에서 검색해보고 이 뮤직비디오에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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