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 핑야오
" No problem!!"
핑야오 고성 안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의 여사장은 커다란 몸집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여전히 '문제 없다'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대답을 듣고도 여전히 '문제 없지 않았다'. 도착한 날부터 며칠동안 계속해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마주칠때마다 떠나는 기차표를 구할 수 있냐고 묻는 내게, 그녀는 귀찮을 만도 한데 여전히 밝고 커다란 음성으로 '노 프라블럼'만을 외쳐대며 표를 구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점심에 얘기해라, 점심에는 저녁에 얘기해라 라고 하는 뉘앙스가 전형적인 사기의 냄새가 풍겼지만 일단 돈을 미리 지불하지는 않았기에 딱히 더 강하게 재촉할 수 없었다.
중국은 듣던대로, 아니 듣던것 보다 훨씬 차표 구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외국인은... 거기에 기본적으로 어떤것이든 공급이 따라갈 수 없는 수요를 가진 세계 최고의 인구 대국이니, 최고의 휴일이라는 국경절 연휴기간에 미리 예매하지도 않고서 기차를 타고 어딘가를 가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초짜 여행자에게까지 돌아올 표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나도 이곳에 오면서 기대도 안했었다. 원래의 계획도 핑야오를 보고 나서 조금 번거롭기는 해도 다시 거꾸로 대도시인 타이위안으로 나가서 기차표를 구해볼 요량이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표를 구하기는 힘들다고 하지만 완전 불가능한 이곳 보다는 나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곳 숙소에서 체크인 할 때 책상에 붙어있던 기차 시간표를 보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시원시원한 목소리의 주인공 그 여사장이 '노 프라블럼'을 아주 멋진 발음으로 해주었던 것이다.
뜻밖의 반가운 소식에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은 오히려 처음 올때보다 무거워져 갔다. 표를 구했냐고 물어볼 때마다 자꾸 다음으로 미루며 '노 프라블럼'만을 외쳐대니 나중에는 혹시 '노 프라블럼'에 내가 모르는 다른 부정의 뜻이 있는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게 되었다.
결국 며칠을 이 고성안에서 보내고 떠나는 당일이 되어 체크아웃을 하려고 짐을 다 챙겨 식당겸 로비겸 사무실로 사용하는 1층으로 가서 짐을 맡아줄 수 있냐며 '나 오늘 떠나는 날이다' 라는 걸 강조하듯 과장되게 짐을 이리저리 들고 다녀도 그녀의 입에서는 기차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또 다시 먼저 표 이야기를 꺼냈고 그녀는 또 다시 '노 프라블럼'을 외쳤다. 오후면 될꺼라며....
불안한 마음의 나는 범인을 잡기위해 기다리는 잠복형사의 마음으로 숙소 주위를 떠나지 못했고, 혹시 이런식으로 해서 자기 숙소에 하루 더 묵게 하는 고도의 영업전략이 아닐까 하는 심증은 머리위로 점점 올라가는 태양처럼 내 마음속에서 둥둥 떠올랐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표를 구해왔다. 나를 포함해서 무려 5명의 표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는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것 같았다. 그러니 그렇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노 프라블럼'을 외칠 수 있었겠지. 생각했던것 보다는 꽤 비싼 수수료를 요구하긴 했지만 다시 타이위안까지 돌아가야 하는 비용과 시간 그리고 그 수고를 감안하면 나름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한가지 불안한 점을 빼면...
그녀가 전해준 표는 정식으로 기차역에서 구매한 표가 아니고 A4용지에 복사한 흑백의 표였다.
출발지는 '타이위안' 목적지는 내가 가려던 곳보다 더 먼 곳. 추리해 보면 타이위안에 있는 그녀의 공급책(?)이 거기에서 표를 구매해서 팩스나 인터넷으로 보내면 이곳에서 받아서 의뢰인에게 주는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이게 표 정말 맞냐?'고 묻자 또 다시 '노 프라블럼'을 위치며 걱정말라고 했다. 귀에 못이 박힌 문제없다는 말은 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지만, 나 말고도 든든한 4명의 유럽 처자들이 같이 표를 샀으니 혹시 무슨일이 생기면 다들 나보다도 더 덩치가 큰 그녀들이 어떻게든 해결해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자정이 넘어 숙소에서 불러준 전동차가 왔고, 종이에 복사한 표를 한장씩 받은 우리 동지들은 무사탑승을 빌어주는 것 같은 여장부 사장과의 찐한 포옹을 나누고 적진에 침투하는 특공대처럼 인적없는 고성의 어둠을 헤쳐나갔다. 삼일이나 묵으면서 한번도 나가보지 못했던 고성의 바깥은 정말 억울하게도 아름다웠다. 거대하고 장엄한 그 성벽은 수많은 조명을 받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우물한 개구리가 우물을 처음 나올때의 심정이 된 것 같았다. 그건 고대의 멋진 건축물으로 처음 보았을때,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지역에 갔을때, 최고의 자연경관들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두려움과 무지, 익숙함과 무던함에 길들여지고 안주했던 것들에 대한 후회였다. 이곳까지 와서도 결국은 새로운 우물안에 있었던 것에 대한 후회..
전동차는 그 찬란한 성벽을 뒤로하고 우리를 핑야오역에 내려주었다. 씩씩한 네명의 여 동지들은 몸집만한 배낭을 둘러메고 앞장섰고 나는 그 뒤에서 캐리어를 끌고 쫄레쫄레 따라갔다. 중국은 모든 기차역, 전철역, 터미널에서 짐에 대해 엑스선 검사를 한다. 우리의 공항처럼.. 북경의 수많은 전철역을 포함해서 어디를 이동할때마다 하다보니 이제는 귀찮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고, 의당 그래야 하는 사람처럼 자동적으로 캐리어를 올린다. 하지만 사실 이게 정말 작동을 하는 건지는 의심스럽다. 한번도 걸린 사람을 못봤으니...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드디어 처음으로 스캔에 걸린 사람을 보게 되었다. 북경의 천안문도 아니고, 발디딜틈 없던 북경서역도 아니고 이 허름한 핑야오 역에서.... 그런데 하필이면 그사람이 우리의 씩씩한 여동지 중 한명이었다. 나머지 우리들은 무사히 통과해서 대합실의 한쪽에 자리를 잡고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후 그녀는 다행이 다른 큰 불상사없이 우리에게 왔다. 그녀에게 문제 되었던 짐은 '칼' 이었다. 일반적으로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가지고 다니는 스위스칼이나, 컷터칼이 아니라 진짜(?) '칼' 때문이었다. 그녀의 설명을 들어보면 아마도 단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칼집까지 있는 제법 칼 같아 보이는 칼
아이러니 한것은 그녀가 이 칼을 여기서 산것이 아니고 고향 집(루마니아인지 불가리아인지 네덜란드인지 헛갈리는)을 떠날때부터 그녀의 배낭안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기차를 타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한번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그 칼이 하필 이곳에서 문제가 된 것이었다. 하필 말도 안통하는 이 작은 시골역에서..
그녀는 씩씩한 우리의 동지답게 통크게 한번 웃어 넘기며 그다지 많이 아쉬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와는 달리 그들은 쉽게 놓아줄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후 역무원의 복장을 차려입은 세명의 직원은(아마도 그시간에 역에 있던 직원 전부였을것이다.) 한 젊은 여자를 대동하고 우리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젊은 여자는 통역이었다. 아마도 이 시골역에서 유일하게 영어가 가능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순간 긴장했다. 압수했는데 왜 다시 왔을까 하며...
잠시후 기차역안의 모든 관심은 (루마니아, 불가리아, 네덜란드 중 한곳에서 온) 그녀와 통역녀와 역무원에게 집중됐다. 급기야는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반 이상이 우리 주위를 둘러 쌓고서 사건의 추이를 지켜봤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동네의 약간 모자란(결코 기차를 타기위해 온것이 아니란걸 한눈에 봐도 알것 같은) 때가 덕지덕지 묻은 촌스런 트레이닝 복을 입은 그 청년까지도 궁금해했다.
통역녀의 입을 빌어 영어로 번역된 이야기의 요지는 이랬다. '그런 칼은 반입할 수 없다. 그래서 돌려줄 수 없다' 우리의 동지는 이미 포기했기 때문에 '알았다. 괜찮다' 라고 답을 했다. 그렇게 끝난것 같던 사건은 잠시후 통역녀가 다시 오더니 우리의 동지를 잠깐 보자며 역무원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이곳에 우리가 함께 있으니 그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해서 데려간건가? 그녀를 고문하는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며 우리는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후 그녀는 다행이 밝은 표정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손에는 그녀가 한글자도 읽을 수 없는 한자로 된 서류가 들려있었다. 그녀의 지장과 함께...
이러저러해서 칼을 압수했다. 그녀도 동의했다. 아마도 이런 의미의 서류 였으리라.
한글자도 읽을 수 없는 서류에 붉은 인주를 묻힌 지장을 찍은 그녀의 느낌은 어땠을까?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기차를 타고... 산을 넘고 물을 넘고 대륙을 건너 이곳까지 왔지만 낯선곳에 혼자 남겨진 칼의 느낌은 어땠을까?
우리는 그 칼을 외로운 타지에 남겨두고 깜깜한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렸고, 새벽의 깜깜한 기차 안에서 각자의 3층 침대칸을 찾는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잠깐만 방심하면 기차 천정에 머리를 부딪히는 침대칸의 3층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누운 나는 그제서야 그 칼이 생각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홀로 남겨져야 했던 그 칼이..
아마도 지금 핑야오의 어느 창고 안에서는 주인을 잃은 칼이 부르는 노래가 구슬피 들려오고 있을것 같다.
루마니아인지 불가리아인지 네덜란드인지에서 온 칼이 부르는 노래가...
* 핑야요(平遙)
산시성에 위치한 핑야오는 14세기에 세워진 도시로 아직까지 고대 성곽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