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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Oct 30. 2019

도둑들.. - 스리랑카 - 캔디(Kandy)

달콤한 이름을 가진 도시 캔디(kandy)로 가는 길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감히 내가 경험한 여행 중 손에 꼽을 숙소라 칭할 수 있는 담불라의 칸달라마 호텔을 나서는 순간, 다음 목적지가 어느 곳이 되었든 이곳과 비교 평가되어 상대적으로 더 저평가를 받을 것을 예상하였지만 그래도 이건 마치 최고의 권세가가 반역죄인으로 몰려 몰락한 듯 한 급격한 신분 변화였다.



그 급격한 신분 변화는 호텔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담불라 시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호텔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교통수단이 필요했다. 들어올 때야 아무 생각 없이 툭툭을 불러 타고 왔지만 막상 이곳에서 자고 나니 하루 만에 내 안의 알뜰한 여행자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마치 처음부터 이런 여행만 했었던 것 같은 고급진 여행자가 들어와 계셨다. 그러니 다들 택시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호텔 로비에서 툭툭을 불러 타고 갈 용기가 선뜻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창피함은 잠시, 지갑의 두께는 영원한 것,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지켜보고 있는 빈 택시기사들 앞에서 30분을 기다려 툭툭이를 불러 탔다. 뒤통수의 뜨거움을 빨리 식히기 위해서 바로 출발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짐 싣는 게 쉽지 않다. 큰 짐을 툭툭의 트렁크라 부르기도 민망한 뒷공간에 이리저리 돌려가며 꾸역꾸역 끼워 넣고 무릎을 움직이기도 힘든 앞 공간에도 짐을 놓고 시댁에 처음 인사드리러 가는 새색시 마냥 무릎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딱 붙이고 비에 젖은 황톳길을 달렸다.



대체로 세세한 계획 없이 발길 가는 대로 하는 여행을 즐겨하는 내게도 나름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여행지의 낯섦과 두려움의 세기가 높을수록 도착시간을 낯 시간으로 한정한다. 낯선 곳에 도착하면 다음 목적지가 정해져 있건 아니건 빠져나갈 방법을 미리 강구한다.’ 등이다.



담불라에 도착하자마자 위의 법칙에 따라 터미널의 모습(?)을 갖춘 곳을 찾아 버스들의 행선지를 파악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좋은(?) 버스의 존재 여부를 파악했었다. 여기서 좋은 버스란 에어컨이 나오며 자주 서지 않는 버스를 말한다. 버스의 크기까지 따지는 건 오아시스에서 31가지 아이스크림 찾는 욕심이다. 다행히 담불라에 올 때 기대치 않았던 기대를 상회하는 버스를 경험했기에 그 정도만 있으면 감지덕지였다. 물론 짐 싣는 데가 마땅치 않아 짐들도 한자리 비용을 지불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함께 했지만 그 정도쯤이야 몰락한 양반의 허리춤에 숨겨놓은 비상금으로 해결 가능했다. 처음 도착해서 갔던 담불라 터미널에서 기쁜 정보 하나와 슬픈 정보 하나를 얻었다. 기쁜 정보는 캔디로 가는 에어컨 버스가 존재한다는 것이었고 슬픈 정보는 시간표는 못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매나 예약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꽤 큰 수확이었다. ‘출발시간이야 당일날 와서 좀 기다리면 되지 않겠어?’라고 생각하며 큰 정보를 얻은 상으로 스리랑카에서의 첫 길거리 간식까지 사 먹었었다.



이틀 전 터미널에서의 일들을 떠올리며 툭툭이 엔진 소리에 행여나 묻힐세라 기사의 뒤에서 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캔디, 버스, 에어컨'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낯선 여행에서의 법칙이 또 하나 있다. '절대 한 번에 알아 들을리 없다. 삼세번은 해라. 그리고 주기적으로 상기시켜라'이다. 다시 한번 '캔디, 버스, 에어컨'을 외쳤고 그는 다시 고개를 자신 있게 끄덕였다. 그의 자신감에 두 번만 시도했고 십 분여를 달리다 다시 한번 '캔디, 버스, 에어컨'을 외쳤다. 잠시 후 툭툭은 담불라 시내로 접어들었고 초입에 있던 터미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가지런히 모아져서 굳어버린 것 같은 무릎을 움직이며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툭툭이는 터미널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에어컨까지 말할 시간 여유가 없어 다급하게 '캔디 버스 캔디 버스'를 외치며 손으로 터미널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는 자신 있게 고개를 저으며 앞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캔디 캔디'



그의 너무나도 확신에 찬 손짓에 나는 잠시 주춤했다. '이곳 주민이 이렇게 자신 있게 얘기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언가 더 좋은 버스가 있음에 틀림없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 했다. 그렇게 툭툭이는 조금 더 달려 길거리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는 버스 정류장 표시 밑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다시 한번 '캔디 캔디'라고 말하고는 휑하고 사라졌다.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는 이유는 애매함 때문이다. 이 애매함이 사람을 갈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선택하자니 저것이 애매하고, 저것을 선택하자니 이것이 애매하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서 터미널까지 가자니 걸어가기 애매한 거리이고, 큰 맘먹고 걸어가야지 하고 생각하니 짐의 무게와 부피가 애매하고, 다시 툭툭을 잡으려니 잡힐지가 애매하고, 잡혔다 치면 다시 짐을 구겨 넣고 무릎을 구겨 넣고 그 짐을 다시 내릴게 애매하다. 그 와중에 마치 짜고 치는 듯이 캔디에 가는 버스는 애매하지 않게 타이밍 딱 맞게 도착한다. 그리고 그런 타이밍은 항상 후회를 동반한다.



버스 안내양 아니 안내군의 '캔디 캔디'라는 외침에 이번에 타지 않으면 캔디에 가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었다. 스리랑카 현지인들 틈에 끼어 꾸역꾸역 버스에 오르고는 출발하자마자 곧바로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잖아'라고 소리치고 싶어 졌다. 온 동네 다 들려가는 초 울트라 완행 버스에서 하교하는 학생이 탔다가 내리고, 장을 보고 집에 가는 아주머니가 탔다가 내리고, 한국에서 몇 년 동안 일하다가 왔다는 청년과 옆자리에 앉아서 한참을 이야기하고 그의 여자 친구 사진을 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 툭툭이 아저씨가 확신에 차서 버스정류장을 가리키며 외치던 '캔디'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이 의문은 스리랑카 여행을 마칠 때쯤 풀렸다 아니 풀린 것 같았다. 내가 그 버스를 탄다고 해서 그에게 아무런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데도 굳이 그곳으로 데려간 이유는 그는 에어컨 버스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일생에서 버스란 어디든지 다 들렀다 가는 로컬버스가 전부였을 것이다. 그래서 행여나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 에어컨 버스를 탄다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스리랑카 여행을 해 본다면 내 결론이 이해가 될 것이다.











버스는 우여곡절 끝에 종착지인 캔디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현지인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이방인만 남는다. 달려드는 툭툭 기사들을 순식간에 매의 눈으로 스캔하고 착해 보이는 기사를 골라 가고 싶었던 숙소의 이름을 말한다. 다시 짐과 몸을 툭툭에 구겨 넣고 숙소를 찾아 출발한다. 캔디의 여행자 숙소는 대부분 중앙의 Kandy Lake가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가이드 북과 구글 위성 맵을 하도 들여다봐서 아주 낯설지 않은 캔디의 호숫가를 달려 가이드북 숙소 추천 1순위의 곳으로 간다. 물론 중간중간 계속 더 싸고 더 좋은 곳이 있다는 툭툭 기사의 유혹을 물리치거나 무시해야 하는 미션 또한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나를 다른 곳으로 빼돌리려는 기사의 미션도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원하는 숙소 바로 근처의 숙소에 갑자기 툭툭을 세우더니 들어가서 보기만 하란다. 고지가 바로 저 앞인데 그의 기분을 굳이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에게 마치 호기심 가득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가 본다. '최악이다.' 캔디는 스리랑카 제2의 도시이며 문화의 중심지라서 숙소를 예약해야 한다고 하는데 손님이 이렇게 없는 숙소가 있다니.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 건지 요즘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후자라면 내게는 아주 다행이다. 툭툭이 기사와 숙소 주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약간 고민하는 듯한 연기를 하며 일단 내가 말한 곳에 가보자고 한다. 가이드북 1순위 숙소는 생각보다 너무 높은 곳에 있었고, 생각보다 시내랑 멀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방도 없었다. 바로 앞에 도착한 중국인 커플에게 마지막 방이 나갔다고 했다. 좀 전에 그 숙소를 들리지 않았다면 내 차지가 되었어야 할 방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위치도 맘에 안 드는데 차라리 잘됐다 생각했다.



툭툭이 기사와 함께 그 근처의 몇 곳을 더 돌아봤다. 다들 방이 없었다. 그렇다고 처음에 본 아무도 없던 그곳에는 갈 수 없었다. 위치도 위치이고 방이 도저히 몸을 누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툭툭이 기사는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여기저기 툭툭을 몰았다. 한 곳은 심지어 경사가 너무 심한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툭툭이를 타고 올라갈 수 없었다. 툭툭이에 짐을 놔두고 기사와 함께 걸어서 방을 보러 올라갔다. 솔직히 이곳은 방이 없길 바랬다. 숙소를 나서면 다시 돌아올 걸 염려해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을 곳 같았다. 다행히 바람대로 방은 없었다. 기사와 함께 거의 기다시피 언덕을 내려오며 생각했다.



'얼마나 방이 없으면 여기까지 꽉 찼을까?' 이때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워낙 데이터 속도가 느려 안 쓰려고 했지만 이제 방법이 없었다. 스리랑카 유심을 넣은 핸드폰을 꺼내어 숙소 예약 앱을 실행시켰다. 아직 방이 있다고 뜨는 한 곳을 보여주며 이곳을 가자고 했다. 지도로 보면 바로 근처였다. 하지만 그는 지도 보는 게 익숙지 않아 보였다. 결국 호수 옆길을 3~4번은 왔다 갔다 했지만 찾지 못했다. 지도 상에서는 분명 근처인데 목적지가 가까워지다가 순식간에 뒤로 가고, 다시 반대로 향하면 또 목적지가 가까워지다가 순식간에 뒤로 간다. 나는 지도에 보이는 작은 길을 가리키며 이곳으로 가자했다. 그는 너무도 자신 있게 그쪽에는 길이 없다고 했다. 결국 그 숙소는 포기하고 다시 그 근처의 숙소를 하나하나 들려보는 방법을 이용해 드디어 한 곳을 찾아냈다. 캔디에 도착한 지 2시간이 넘어서였다.



비록 호수가 보이는 작은 베란다는 원숭이들과 함께 써야 할 것 같았지만 이 정도면 방의 위치나 크기는 좋은 듯하여 이틀을 묵기로 했다. 이틀은 빨래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스리랑카 2주 여행을 위해 준비해 온 세벌의 티셔츠 중에 그동안 순위대로 입어왔던 1순위, 2순위의 티셔츠를 빨았고 여차하면 버려도 되는 3순위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베란다의 원숭이들이 마음에 약간 걸렸지만 담불라의 칸달라마 호텔에서 널어놓은 옷은 건드리지 않던 원숭이를 보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베란다의 의자 위에 빨래를 널었다. 그리고 문화의 도시 캔디 탐방에 나섰다.



캔디 근교의 거대 식물원까지 보고 알차게 하루를 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나는 좌절했다. 베란다에 있어야 할 사랑스러운 1번, 2번 티셔츠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1년을 다닌 여행에서도 10원 한 장 안 잃어버렸던 내 여행 인생에 정말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애통한 마음을 달래다가 담불라의 칸달라마 호텔부터 지금 숙소까지 오는 그 고난의 길이 문득 잘 짜인 각본이 아닐까 하고 느껴졌다.



칸달라마에서 원숭이들이 옷을 안 건드려서 나를 방심하게 만들고, 툭툭이 기사가 에어컨 버스를 타지 못하게 만들고, 캔디의 숙소들이 담합해서 있는 방을 없다고 한다. 툭툭이 기사가 지도를 못 보는 척하고, 있는 길을 없다고 해서 이곳까지 오게 만든 후 베란다 있는 방을 주고 그곳에 빨래를 널게 한다.



'지까짓게 완벽하게 조심하는 여행을 한다고? 한번 혼내줘야겠구먼' 하고 작정한듯한 완벽한 시나리오.

 여행 5일 만에 달콤해 보이지만 사실은 쓰디쓴 스리랑카의 캔디에서 나는 겸손을 배우고 단벌신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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