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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Oct 23. 2019

취하고, 취하고, 취하다 - 미얀마 - 바간

미얀마의 하루는 참 길다. 여행자들은 많은 걸 보기 위해 하루를 길게 쓰고, 현실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하루를 더 길게 쓴다.


마치 관광객들에게 마법이라도 걸려는 듯 밤새 틀어 놓은 알 수 없는 주문과 덜컹거림에 시달리고 나서 새벽녘에야 버스에서 내린다. 내리자마자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부들에게 인수인계당하듯 넘겨져 마차를 타고 일출을 보러 간다. 다시 그 마차를 타고 마을의 끝에 있는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푼다. 그럼 이제 아침 8시다. 일상적인 날의 하루 운동량을 소화해 냈는데도 일상의 기상전 시간이다.


대충 짐을 던져 놓고 일단 눈을 붙인다. 이거라도 안 하면 하루가 너무 길 것 같다. 한참을 잔 거 같은데 한 시간 남짓 지났다. 방의 구성품이라고 해야 내가 누워있는 침대와 짐을 던져 놓은 빈 침대, 빨래 두어 개를 얹어서 널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구가 전부인 방 안에서 잠을 빼고는 도저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쩔 수 없이 동네 마실 복장을 챙기고 방을 나선다.


여행지의 숙소들 대부분이 동네 지도쯤은 공짜로 구비해 놓기 마련인데 이곳은 사야 한단다. 사실 매사에 '안'기대주의자(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기대의 크기를 줄이는 게 실망도 줄이는 것)인 내가 미얀마에는 기대가 컸나 보다. 역시나 그 기대는 첫 도시인 양곤에서부터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이다. 쿨한 여행자인 척 지도를 산다. 리셉션에서 머스트 뷰 포인트 족집게 단기 속성 강의를 듣는데 거리가 만만치 않다. 그때 마침 운명인지, 우연인지 자전거가 눈에 띈다. 이건 순전히 내 눈에 먼저 띈 거다. 그들이 권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발견한 것이다.


'지도까지 사야 하는 철저히 상업적인 곳에서 왜 자전거 렌트 이야기를 안 하지? 나를 무슨 고생을 시키려고 자전거 빌리라는 소리를 안 하는 거지?'


렌트비를 묻고 바로 빌렸다. 한대뿐인 자전거 혹시라도 족집게 강의 듣는 동안 다른 사람이 빌리기라도 할까 봐서...


언제나 처음은 즐겁다. 낯선 환경도 흥미롭고, 체력도 충분하다. 마을 끝에 잡은 숙소 덕에 여기저기 사진을 찍다 보니 마을을 빠져나가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마을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아! 오늘 아무래도 쉽지 않겠구나!!'


숙소도 멀어서 중간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사실은 다시 나오기 귀찮아서) 올드 바간과 뉴 바간을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결국 일몰까지 보기 위해서 하루를 온전히 자전거 위에서 보내야 했다.


다시 깨달은 진리. 공부하지 않은 자 몸이 고생할지어다!!


바간에서 나는 하루 종일 발의 노동에 처음 취했다.













바간의 태양은 이곳 사람들처럼 참 부지런했다. 발이 안 보이게 페달질을 하는 내 머리 위에 착 달라붙어서 나를 쫓아다녔다. 마을 안에서도, 차가 거의 안 다니는 파고다 지역에서도, 시간이 너무 안 가서 무작정 가봤던 뉴바간에서도 태양은 언제나 내 머리 위에 있었다.


사실 중간에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시도해 보았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너무 힘들기도 했었다. 가는 도중 마음에 드는 식당을 만났지만 좀 더 가면 더 괜찮은 곳이 나오거나 숙소가 나올 거라 생각하고 지나쳤다. 내 마음의 바람이 지도의 축적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항복했다. 지금 상태로는 다른 식당이나 숙소가 나오기 전에 먼저 쓰러질 것 같았다. 지도의 축적을 무시한 대가로 마지막 남은 체력이 다 방전될 즈음에 아까 보았던 식당에 다시  도착했다.


자전거를 주차하고 그늘에 들어가 샌드위치와 맥주와 물을 주문했다. 물을 한 컵 가득 따라서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바로 맥주를 따랐다. 밤술(?)도 안 좋아 하지만 낮술은 마시고 나면 머리가 아파 더욱 꺼리는데 여행 오면 그래도 기분에 가끔 낮술을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기분에 하는 낮술이 아니라 너무 힘들어서 하는 술이다. 너무 더워서 하는 술이다. 이상하게 너무 목이 마르니 맥주가 당겼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커다란 맥주 한 병을 다 마셔버리고 다시 한 병을 주문했다. 두 번째 병도 다 마셔버렸다.


술을 마시면 머리가 아프고 기분이 별로고 다음날이 힘들기만 했는데 오늘은 기분이 좀 다르다. 온몸의 정신과 근육의 힘이 모두 빠진 상태에서 침투한 맥주는 혈관에 파고들어 순식간에 온몸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다들 이 기분에 술을 마시는 걸까? 육체의 힘듦이나 근육의 노동에 대한 정보를 혈관에 흐르는 알코올들이 쏙쏙 빼먹어 뇌까지 전달이 안되나 보다. 페달질이 안 힘들다. 태양도 안 뜨겁다. 덜컹거리던 비포장 도로가 너무 푹신하다. 그리고 얼마 후 길가 옆 그늘 밑 평상에 자전거 받쳐놓고 신발 가지런히 벗어놓고 뻗었다. 제대로 뻗었다.


뉴 바간에서 올드 바간으로 가는 어느 길 위에서 오늘 미얀마 맥주에 두 번째로 취했다.














미얀마로 나를 이끈 건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크고 작은 파고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 도저히 세어 볼 엄두가 나지 않는 사진 때문이었다. 그 사진들 덕분에 나는 지금 바간에 와 있다.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 진짜 말이 끄는 마차를 타서 한참을 달리고, 작은 손전등에 의지해 더듬더듬 파고다를 오르고, 자전거를 하루 종일 굴려 수많은 파고다를 본다. 사진으로 볼 때 마치 복사해서 붙여 넣기를 한 것 같았던 그 파고다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 다른 높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파고다는 사진을 찍고, 어떤 파고다는 올라가 보고, 어떤 파고다는 그냥 지나치며 보고, 어떤 파고다에서는 쉬었다 가기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그 시절 파고다를 지을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면 어떤 의미로 짓게 했을까? 상상은 언제나 꼬리를 쉽게 내어주어 다른 상상이 그 꼬리를 물게 한다. 덕분에 그렇게 더디던 시간이 조금 빨리 흘러갔고 지금 이 순간 이 마을에 있는 모든 외국인은 파고다에서 태양의 퇴근을 바라본다.

사진 한 장 덕분에 오게 된 이 멀고도 먼 곳에서 오늘 세 번째로 파고다에 취했다.












P.S : 나중에 알게 된 사실. 자전거 말고 다른 교통수단이 있다는 사실.

        "여기에서 당신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시오"

       광고 문구를 보니 그들도 알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면 힘들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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