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낯선 여행지에 도착하면 이상하게 3시간 넘게 연속으로 잠을 못 잔다. 한참을 잤다고 생각하고 깨어 시계를 보면 어김없이 3시간이 지나 있다. 그러면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하고 깨어 보면 또 3시간이 지나 있다. 낯선 환경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라고 억지로 결론을 내려보지만 고령화 여행자가 되어가는 전조 현상임을 부정할 수 없다.
미얀마 양곤에 처음 도착한 날도 그랬다. 해가 지고 나니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지는 숙소 덕분에 일찍 잠을 청했는데 깨어보니 정확히 3시간이 지나 있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더 잠드는 걸 포기했다. 양 옆으로 한 바퀴 이상 구르면 중력의 힘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은 낡은 침대에 누워 하루의 동선을 그려본다.
안 그려진다. 커다란 팔절지 논술 답안지에 딱 한 줄 쓰니 끝이다. 이대로 제출했다가는 분명 낙제다. 어제 카운터에서 받은 시내 지도를 슬쩍 커닝해 본다. 카운터의 아가씨가 일출이었던가 일몰이었던가가 괜찮다고 한 곳이 가까이 보였다.
깐도지 호수
숙소 앞에 택시 세워놓고 자던 기사를 깨워 평소 같으면 걸어갈 곳을 해 뜨는 시간 가까워졌다는 핑계로 택시 타고 간다. 고령화 여행자 분명한 것 같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일출이 아니고 일몰이었다는 것을. 쉐다곤 파고다가 보이는 방향이 서쪽이었다. ‘맨날 건성건성 듣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숙소로 돌아가 잠시 휴식 후 다음 목표인 양곤 순환 열차 타기에 도전한다. 사실 양곤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명색이 미얀마 최고의 도시인데 하루라는 시간이 너무 짧을 줄 알았다. 그러데 도착하고 숙소까지 타고 오는 택시 안에서, 그리고 쉐다곤 파고다를 걸어가 보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하루가 무척 길 수도 있겠구나.’
이런 곳에서의 구세주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사용할 수 있는 곳이나 일을 찾는 것이다. 시내버스 타고 종점을 왕복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내가 지금 하려는 순환열차를 타거나.
게으른 여행자는 아침에 해봤으니 이제 제대로 여행자가 되어 보아야지. 지도를 펼쳐 보며 기차역까지 열심히 걸었다. 순환열차는 메인 매표소가 아니고 플랫폼에서 직접 사는 거라고 직원이 친절히 알려준다. 눈 앞의 여러 개의 철길을 건너야 하는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친구가 뒤로 돌아가 육교로 올라가라고 알려준다. 육교 위에서 보니 내가 잘 찾아가나 계속 보고 있다. 고마워. 손을 한번 흔들어주니 수줍게 웃는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플랫폼을 찾아 외국인에게 받는 거금(?) 1달러의 요금을 내고 표를 산다. 9시 즈음에 도착했는데 5분 전에 한대가 떠났고 10시 10분에 다음 열차가 출발한다고 할 때만 해도 ‘앞차를 놓치긴 했지만 오늘 미션이 너무 싱겁게 끝나는군’ 하고 생각했다.
5분쯤 흘렀을까? 음악이나 들을까 하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내게 표를 팔면서 친절하게 10시 10분에 출발이라며 기차 시간표까지 보여주던 그 매표 직원이 달려오더니 반대편에서 계속 서있던 기차를 가리키며 저 열차를 타라고 한다.
'10시 10분이라며?'
그래도 매표소 직원의 말을 안 믿을 수는 없었다. ‘시간표는 왜 만들어 놓은 거야?’라고 구시렁 거리며 달려가 열차에 올랐다. 자리를 잡고 카메라 세팅을 만지고 있는데 제복을 입은 누군가 다가온다.
'어디 가요?'
'양곤 순환선 아니에요?'
'아니에요 반대쪽에서 타세요.'
또 부랴부랴 내렸는데 하필 반대쪽에서 또 기차가 온다.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고민의 가장 큰 이유는 말도 못 알아듣고 지명도 낯선데 아무거나 탔다가 다른 지방으로 가기라도 하면 저녁에 바간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 나는 난감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정이 넉넉하면 모험을 해보겠지만 안 그래도 교통이 안 좋은 미얀마에서 행여나 엄한 데로 갔다가는 큰일 난다. 생각만 해도 등에 식은땀이 난다.
이쪽에도 매표소 비슷한 게 있어서 들어가서 물어보니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하다. 한참을 옥신각신 하더니 저 기차는 아니란다. 근데 어디서 타야 하는지, 어떤 걸 타야 하는지는 안 가르쳐 준다.
'그래 어차피 10시 10분까지는 시간 많으니까 기다려보자' 하고 여기저기 기차와 사람들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직원이 와서 정확한 시간과 타야 할 곳을 알려준다. 그의 말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문법 선생님 같은 정확한 영어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니 기차 시간은 10 past 10이야!'
동네에서 따 온 것 같은 과일을 팔고 있는 엄마와 아기가 보인다. 아주 재밌게 장난을 치고 있길래 카메라를 보여주며 찍어도 되는지 묻자 엄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아기가 자꾸 얼굴을 피한다. 처음에는 엄마도 노력해 보다가 포기한다.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표정이다.
좀 전에 스치며 보았던 사탕 팔던 소녀가 떠올랐다. 가서 막대 사탕 하나를 샀다. 아기 앞에서 사탕을 흔들었다. 아기 인생 최대의 유혹이 아니었을까? 아기는 주저주저하다가 결국은 유혹에 넘어갔다. 하지만 마지막 자존심은 지켰다. 사탕을 받고 쏜살같이 다시 달아나 기둥 뒤에 숨는다.
아기 달래기 첫 번째 작전 실패다.
플랫폼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니 드디어 순환열차가 들어온다. 순환열차의 의미는 양곤 외곽을 아주 천천히 달려서 3시간 후에 다시 양곤역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기차에는 좌석 등급이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미얀마 현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서 지하철 같이 생긴 좌석이 있는 칸에 타려 하는데 직원이 옆에 칸에 타라고 한다. 그곳은 우리의 옛날 비둘기호나 통일호 같은 마주 보고 앉는 좌석이 있는 칸이었다.
직원은 나름 배려해서 좋은 곳을 안내한 거지만 나는 현지인들과 함께 타고 싶었다. 이 기차는 심지어 다른 칸이랑 통하는 공간이 없어서 다른 칸으로 가려면 내려서 그쪽으로 가서 다시 타야 한다.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 가이드랑 함께 다니는 서양 여행객들은 내가 원하던 칸에 타는 걸 보니 왠지 더 아쉬웠다.
세 시간이나 타야 하는데 저쪽은 불편할 거야. 분명 불편할 거야. 자기 최면을 걸어본다. 세 시간 동안 내 옆자리에는 예쁜 아가씨도 앉고, 장에 갔다 오는 모녀도 앉고, 가족 나들이 중인 아저씨도 앉고, 해양 선원으로 한국에도 다녀갔던 마도로스 아저씨도 앉았다. 허허벌판 쓰레기가 많던 기차역도 지나고, 정신없던 시장도 지나고, 사람이 몇 명 없던 기차역도 지났다.
그렇게 두 시간이 넘어가던 시점에 사고가 터졌다.
자리가 없어 서서 가던 아주 젊은 부부의 갓난아기가 울음이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쪽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기가 10분도 넘게 계속 울자 드디어 보다 못한 젊은 부부 앞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나섰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안심했다. 아기를 달라는 할머니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울음소리가 작아지는 듯하던 아기는 아까보다 더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당황하는 얼굴만큼이나 미안해하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뒷좌석의 아주머니가 아기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 아주머니의 얼굴에도 자신감이 넘친다. 할머니보다 더 자신 있는 모습이다. 혹시 현역 유치원 원장님일까? 내 예상은 멋쩍게 빗나갔다. 그 아주머니는 한치의 주저 없이 웃옷을 젖히고 가슴을 드러내 자신의 젖을 물렸다. 잠깐 열차칸에 정적이 스쳤다. 그 정적 안에는 내심 ‘이제 됐다’ 하는 안도의 정적이 포함되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번 도전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기는 잠깐 상황을 파악한 듯하더니 다시 세차게 울기 시작했다.
이번엔 그 뒷좌석의 조금 더 젊은 아주머니가 아기를 달라고 했다. 아기를 받는 여인의 연령대가 점점 내려간다. 이제 우리(?)도 더 이상 물러날 여지가 없다. 같은 칸에 탄 모든 사람과 아기와의 대결 구도이다. 어디선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의 그녀 ‘틸다 스윈튼’이 나타나 ‘당신들은 아기를 달래지 못하면 영원히 이 칸을 벗어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할 것 같았다.
칸의 모든 사람은 온통 그 아주머니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긴장한 젊은 아주머니는 실력 발휘를 못하는 것 같다. 만국 공통의 방법인 얼르고 달래고 우쭈쭈 신공이 도무지 먹히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다 사용했다 생각하고 포기하려는 찰나 의외의 곳에서 쉽게 풀렸다. 결국 아기가 울음을 멈춘 건 어떤 아저씨가 비켜준 자리에 아기를 안은 엄마가 앉고 나서였다.
미얀마 양곤 순환열차에서 진행된 오늘의 ‘나는 보모다’의 도전자는 모두 실패했고 영광의 우승은 의외의 방청객 아저씨에게 돌아갔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관심받고 웃다 보니 기차는 그들의 삶만큼이나 느리게 달려 세 시간 후 다시 양곤역에 도착했다. 나는 그 세 시간 동안 미얀마랑 왠지 조금은 친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P.S : 양곤역에 다시 도착하면 사람들이 다 내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큰일 날 뻔했다. 다행히 이상한 촉이 발생해 사람들에게 불어보니 얼른 내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