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거짓말을 하지만 발은 언제나 정직하다.
열한번째날.
엄격하고 경건했던 숙소에서 불편했던 점은 개인행동을 하기가 눈치 보인다는 것이다. 다 같이 저녁을 먹었고 아침도 함께 했다. 아침은 원래 잘 먹지 않는데, 순례길을 매일 일찍 출발하다 보니 더더욱 아침을 안 먹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혼자서 인사도 없이 일찍 출발하려니 왠지 눈치가 (이놈의 눈치병) 보였다. 평소에는 보통 7시 전에 출발했는데 일찍 일어나 멀뚱 거리다 8시에 아침을 먹었다.
아침까지 먹어 줬으니 또 마음이 급하다. (이놈의 조급병) 가장 먼저 그릇을 들고 설거지를 했다. Y 양과 P 양은 배낭을 맡겨야 해서 늦게 출발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걷는 속도나 내 욕심으로 봐서 다시 못 만날 것 같아 작별 인사를 했다. 다른 사람들과 자원봉사자에게도 인사를 하고 배낭을 메고 가장 먼저 길을 나섰다. 지금까지 날들 중에 가장 늦은 출발이다. 숙소의 문을 등 뒤에 두고 길을 나서는데 어젯밤 모여서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 자원봉사자가 내게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Jung. 이번이 몇 번째 산티아고 길이야?
'당연히 첫 번째... 아니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
'그건 알 수 없을걸???'
큰 도시는 진입하는데도 오래 걸리지만 벗어나는 데도 한참이다. 작은 마을은 금방 벗어나니 잠깐을 걸어도 먼 거리를 간 것 같지만, 큰 도시는 한참을 걸어도 도시에 있으면 왠지 손해 본 느낌이다. 더구나 대도시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이 한참 걷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길 위에 사람이 너무 많다. 어제 오래 쉬었고 아침까지 먹었더니 기운이 남아돈다. 열흘 정도 지나니 이제 적응도 되는 듯하다.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앞질러 나갔다. 첫 마을까지가 2시간 넘게 걸리고 그다음에는 조금 자주 있으니 처음만 잘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20km 지점의 Hornillos del Camino 마을에 들어갈 때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례길 시작 후 처음으로 비다운 비였다. 이 길을 떠나며 걱정했던 몇 가지 항목 중에 하나였다. '비'. 배낭을 싸고, 메는 것도 불편했는데 비가 와서 우비까지 뒤집어쓰고 걷는 건 제일 하기 싫은 일 중 하나였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그냥 쉬어야지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동안 날씨가 좋았다가 드디어 비를 제대로 만났다.
다행히 마을 입구에서 비가 시작해 우비 없이 빨리 마을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작은 마을은 비가 오니 벌써 다들 숙소를 잡아 버려서 문을 연 곳은 자리가 없었다. '늦게 출발했더니 꼭 이런 일이 일어나지'. 평소처럼 출발만 했어도 아주 여유 있게 침대를 잡았을 텐데 하는 후회는, 일찍 출발했으면 이 마을을 지나쳤을 테고 길 중간에서 비를 만났을 거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달랜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다들 숙소를 잡다 보니 아직 주인이 안 나와있는 숙소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을 따라갔다. 좀 있다 주인아주머니 오더니 다 예약되었다고 한다. 먼저 온 친구가 사정사정하니 다락같은 데에 침대를 매트리스를 놓아준다고 한다. 가격도 비쌌지만 나도 한자리 얻었다. 안 그러면 비를 맞으며 다음 마을로 가든가 택시를 불러야 하니까...
다락은 제법 넓었고 매트리스를 꽤 많이 깔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빨리 도착 한 사람들이 하나 둘 그 자리를 메우고 한자리가 남았을 때 밖에서 우비를 입고 갈팡질팡하는 Y 양과 P 양이 보였다. 일단 불러들였다. 숙소가 다 꽉 차서 어떻게 할까 고민한다고 했다.
말은 안 통하지만 주인아저씨를 불러 통사정을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너무 무서워서 말을 못 꺼낼 정도였다. 카페랑 숙소가 너무 잘 돼서 다락방도 별로 내주고 싶어 하지 않았었다.) 결국 주인아저씨에게 한 명은 매트리스를 쓰고 한 명은 바닥에 침낭으로 자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너무 친절했다. 다락의 창고에서 매트리스를 하나 더 꺼내 주셨다. 결국 두 자리를 만들어 다 같이 잘 수 있게 되었다.
비 오는 숙소에서 그동안 고이 모셔 두었던 라면을 끓여서 함께 먹었다. 라면을 먹는데 Y 양이 내일 가는 중 한마을에 한국-스페인 부부가 하는 숙소가 있는데 거기 비빔밥이 맛있다고 인터넷에서 봤다고 했다. 둘은 이미 예약을 해 놓았다고 했다. 나에게도 생각 있으면 예약을 하라고 했다. 앱을 실행시켜 그 마을을 보니 이곳에서 20km 다음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도 비 때문에 너무 일찍 쉬었는데 내일도 20km만 가려니 너무 아깝다고 생각이 들었다. 할 일도 없는 마을이라 일찌감치 자리에 들었는데 자꾸 머리에서 비빔밥이 떠올랐다. 핸드폰을 꺼내 슬그머니 예약을 했다.
열두번째날.
오늘은 Y 양과 P 양과 함께 출발했다. 이곳은 조식 포함이었는데 식사시간보다 일찍 출발해서 빵과 과자를 챙겨서 나왔다. 출발해서 같이 걷다가 셋이 다 걸음 속도가 달라서 자연히 떨어졌다. 오늘은 어차피 같은 곳에서 모일 예정이어서 부담 없이 내 페이스대로 걸었다.
일찍 출발해서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는데도 여전히 어두웠다. 더구나 흐리기까지 해서 앞이 잘 안 보이니 은근 더 힘들었다. 마을의 카페에 부지런한 순례객들과 이 마을 출발자들까지 모이니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음료를 시키고 쉬고 있으니 그녀들이 도착했다.
'눈은 거짓말을 하지만 발은 언제나 정직하다.'
걸으면서 매번 느끼는 진리이다. '저기까지 언제 가지?', '너무 멀어 보이는데 갈 수 있을까?' 하며 드는 부정적인 마음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발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는 나를 본다. 또한 나보다 먼저 간 사람들은 한참 앞에 가 있을 것 같아도 부지런히 걷다 보면 의외로 얼마 멀리 안가 있고, 내가 한참 많이 앞서 왔겠지 하며 한 숨 돌리고 있으면 느리게 걷는 것 같던 사람도 금방 나를 따라잡는다. 그녀들이 그랬다. 한참 앞서 왔다고 했는데 콜라 한잔 마시려고 하니 금방 쫓아왔다.
휴식을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언제든 처음 걸을 때는 힘들다. 마치 기계에 기름이 돌아야 자연스러워지듯, 걷는 것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면 발바닥은 불편하고 무릎과 허리는 삐거덕 거린다. 그래도 오늘은 목적지가 멀지 않으니 금세 힘을 내어 발을 내딛는다. 몸에 윤활이 돌기 시작하니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이틀 연속 20km의 짧은 거리를 걸으니 걱정도 별로 없다. 다만 어제 비가 오더니 오늘은 꽤 쌀쌀하다.
이어폰을 끼고 멀티넥으로 귀와 머리를 덮고 그 위에 모자를 썼다. 바람도 세게 부는 길을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느낌이 이상해 머리를 만지니 모자가 없어졌다. 이번 순례길을 위해 특별히 포인트로 준비한 모자인데 이렇게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오늘 목적지가 안정해져 있었다면 포기했을 텐데 시간도 넉넉하고 체력도 넉넉해서 찾아보기로 했다.
뒤돌아서 뛰는 듯 걸으며 15분쯤 가자 내가 지나쳐가며 인사했던 일본 아가씨의 손에 반가운 내 모자가 들려 있었다. 길에 떨어져 있었는데 새 거 같아서 누군가 잃어버렸다 생각해서 들고 왔다고 했다. 고마운 마음에 '아리가토'를 여러 번 외쳐주었다.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와 걷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방수 점퍼를 입었다. 아직 우비까지 입을 마음의 준비는 안되었다. 다행히 마을도 멀지 않았다. 드디어 비빔밥 아니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한국인 안주인이 반갑게 맞아준다. 아직 체크인 시간 전이어서 배낭을 벗고 기다렸다. 2등이다. 잠시 후 여전히 생각보다 빨리 Y 양과 P 양도 도착했다.
이른 시간에 도착해 정비를 다 하고 또다시 라면 파티를 했다. 이곳은 한국인이 운영하다 보니 라면이 종류별로 있었다. 오늘은 짜파게티다^^. 드디어 저녁시간.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 꽤 많은 사람들이 비빔밥을 앞에 두고 모여 앉았다. 안주인의 비빔밥 소개와 먹는 법 교육이 끝나고 한국인들은 고추장과 함께, 외국인들은 간장과 함께 신나게 비벼 먹었다. 밥의 양도 어마어마해서 평소 같으면 남겼을 양이지만 언제 또 먹게 될지 몰라서 마지막 한 톨까지 싹싹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