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게 제일 쉬웠어요.
열세번째날.
6인실을 Y 양과 P 양 그리고 그녀들과 첫날부터 함께 출발했다는 어머니와 아들, 일본인 한 명과 함께 썼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식으로 배를 채우고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있어서 인지 마음이 편해 잠을 잘 잤다. 날씨와 비빔밥 덕분에 본의 아니게 이틀을 20km로 짧게 걸었으니 슬슬 거리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이 숙소의 아침식사는 7시 이후부터여서 그전에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6시부터 일어나 다들 짐을 챙기고 거실에 나가 각자 준비한 아침을 먹었다. 음료수에 머핀 한쪽을 먹은 내가 가장 먼저 식사가 끝나고 출발했다. 우연히 만나서 3일을 함께 지냈는데 인연이 된다면 (내가 천천히 걷는다면?) 다시 만나기로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순례길을 걷기로 결정하고 걱정되었던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배낭 싸고, 메는 거야 누구나 다 해야 하는 거니까 당연한 것이고, 개인적으로 물집과 무릎이었다. 원래도 발에 물집이 잘 잡히는 스타일이고 몇 년 전부터 오래 걸으면 한쪽 무릎이 아팠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길을 떠나는 걸 고민하다가 몇 가지 아이템으로 보완하기로 결정했다.
물집 방지를 위해서 발가락 양말, 무릎을 위해서 보호대, 거기에 등산 스틱이었다. 세 가지 용품 모두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고 여기에 와서 다 처음 사용해 보았다.
발가락 양말은 집을 떠날 때부터 착용했는데 은근히 편했다. 덕분에 물집도 신기하게 조금만 잡혔다. 등산 스틱은 배낭에 고이 모셔 놓고 있다가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는 날 중간에 꺼내서 사용했다. 안 꺼낼 수가 없었다. 뭐든 도움이 되는 것은 다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어찌 사용하는지 몰랐는데 날이 갈수록 익숙해졌다.
무릎 보호대는 첫날 정신없어서 착용 못했고 둘째 날부터 착용했다.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덕분인지 몰라도 그동안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계속 도움을 받았는데 이게 사실 은근히 귀찮고 불편한 존재였다. 그래서 열흘이 넘어가면서 무릎 보호대를 먼저 제거해 보았다. 괜찮았다. 걷는 것도 편했다. 이제 스틱을 배낭에 넣었다. 그래도 걷는데 크게 지장이 없었다. 이제 진짜 적응이 된 것 같았다.
다만 이제 다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두 켤레면 충분하겠지 생각했던 발가락 양말이 구멍이 나기 시작했고 이상하게 손이 붓기 시작했다. 양말은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당연한 결과인데 손이 붓는 것은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같은 곳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오늘 숙소로 정하는 25km 지점의 Fromista라는 마을에 점심쯤 도착했다.
광장의 식당에서 야외에 자리를 잡고 콜라와 크루아상을 주문했다. 주인아저씨가 내 손이랑 똑같아 보이는 크루아상을 가져다주며 웃는다. 이곳도 약간 큰 마을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묵는 곳 같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제부터는 나름 초과 걸음이다. 최대한 많이 초과하고 싶었다. 사실 여기까지 하루 걷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이틀 동안 못 걸은 거리만큼 다 걷고 싶었다. 욕심을 좀 내보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그냥 계속 직진 길이다. 옆으로는 도로가 곧게 뻗어 있고 그 옆으로 순례길이 나란히 자리한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길이 다른데 나는 이런 길이 좋았다.
지루한 면이 있긴 하지만 바닥도 좋고 몇 킬로 앞의 마을까지 저 멀리 보이니까 쓸데없는 기대나 상상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렇게 3시간 넘게 13km를 더 가서 멈추었다. 1시간만 더 가면 꽤 큰 마을이 나오지만 시간도 좀 늦었고 사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ㅠㅠ
38.53km. 오늘 최고 기록을 다시 경신했다. 나에게 주는 상으로 거금(?)을 주고 무려 욕조까지 딸린 싱글룸을 잡았다.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을 했다. 이때는 잘 몰랐지만 발은 찬물에 담갔어야 했다.
열네번째날.
38km를 걸었지만 싱글룸과 욕조 덕분인지 덜 피곤하게 일어났다. 싱글룸의 장점 중의 또 하나는 짐을 챙길 때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점이다. 전날 사놓은 사과와 과자로 대충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선다. 한 시간 조금 넘게 가면 큰 마을이 나오고 그다음에 마의 17km 구간이 시작된다. 거기에 큰 마을에서 출발할 많은 사람들을 예상하니 더 힘들 것 같아 또또 마음이 급하다.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12km 이상 세 시간이 넘는 마의 긴 구간은 여전히 힘들었다. 사람마다 걷는 방식이 다르고 힘든 부분이 다를 텐데 개인적으로는 자주 쉬는 것보단 최대한 오래 걷는 걸 선호한다. 쉬면서 충전하고 걷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쉬었다가 출발할 때 다시 적응하기 힘들기 때문에 자주 쉬지 않으려 했다. 굳어진 몸의 발바닥, 무릎, 허리가 다시 걷기에 최적화되기까지 삐거덕 거리는 느낌이 싫었다.
그렇게 마의 구간을 넘기고 작은 마을이 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쉬는데 한 발 앞서 다음으로 가서 숙소를 잡기 위해서 계속 걸었다. 돌이켜 보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다리에 가장 힘이 넘쳤던 것 같다. 아마 순례길의 중간을 지나며 완전 적응을 했던 것도 같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많은 사람들을 앞지르며 거의 뛰듯이 걸었다.
다음 나올 마을들이 너무 작아서 숙소의 선택폭이 적어서 더더욱 힘을 냈다. 그리고 앱에서 보며 찜해 놓았던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수영장도 있고 마당도 엄청 넓은 커다란 곳이었는데 시설이 생각보다 너무 안 좋았다. 아직 걸을 힘은 남아 있었지만 이곳은 너무 작은 마을이고 이미 쉬기로 마음먹었더니 다시 길을 나서기가 귀찮았다. 대신 가격이 저렴해서 2인실을 혼자 쓰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간식들을 챙겨 놓으려고 슈퍼를 찾으니 숙소 주인이 따라오라고 한다. 건물 옆으로 가더니 자물쇠로 문을 연다. 숙소 옆의 작은 공간 바닥에 물건들이 놓여있다. 동네가 너무 작아서 숙소에서 작은 가게도 운영하는 곳이었다. 딱히 내키지 않아 아무것도 사지 않고 저녁은 숙소의 순례자 메뉴를 먹기로 했다. 숙박비가 저렴하다 보니 은근히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들 음식을 조리해 먹는지 식당의 저녁 메뉴는 나와 다른 한 명만 먹었다.
순례자 메뉴는 대부분 비슷하다. 전채요리, 메인, 디저트, 그리고 음료는 와인이나 물을 준다. 하우스 와인을 무한으로 주는 곳도 있고, 대부분 합석을 하니 테이블에 한 병을 주는 곳도 있고 잔으로 한잔 주는 곳도 있다. 술을 잘 안 먹어서 자세히 확인하지는 않았는데 와인 인심은 순례길 초반의 식당은 후했고 뒤로 갈수록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혼자 먹는데도 와인을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사람이 워낙 없어서 개인당 한 병인지 테이블당 한 병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아무튼 다른 테이블의 아저씨도 한 병, 나도 한 병이었다.
이날 처음으로 혼자서 와인 한 병을 다 마셨다. 새 거 와인 한 병을 따서 줬는데 남기기도 미안했고, 손님도 없는데 음식이라도 맛있게 먹어주고 싶었다. 사실 와인을 먹게 된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다. 와인의 이름이 'Camino Franses (순례자의 길 프랑스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와인은 꼭 마셔주어야 길을 잘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마당에서 기타 반주에 멋진 화음으로 노래를 부르던 미국 젊은 친구들의 소리를 자장가 삼아 일찌감치 잠에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