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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Dec 09. 2019

얼렁뚱땅 산티아고 순례길 06

진정한 순례자의 숙소를 만나다.

아홉째날.





주로 소규모 숙소에서 머물러서 수용소 같은 숙소는 오랜만이다. 어제는 37km의 신기록과 함께 온 피로, 약간의 음주와 오랜 수다 덕분에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게 아침이 왔다. 간밤에 악몽으로 인한 잠꼬대로 인해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준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미안한 마음에 새벽같이 길을 나선다. 이제 어둠 속에서 배낭을 꾸리는 게 자연스러워진 걸로 위안을 삼는다.


이제 또 한 번의 대도시 Burgos에 이틀 후면 도달할 거리이다. 오늘 하루 어디까지 갈 것인가가 고민이다. 중간에 마을이 없는 마의 12km의 산길이 있고 그 구간만 넘으면 큰 고비는 넘긴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느샌가 뒤에서 크리스티앙이 나타나 여느 때처럼 큰 걸음걸이로 순식간에 앞질러 간다. 곧 다시 만나겠지 하며 인사하고 지나갔지만 그가 오늘은 다른 날처럼 자주 쉬지 않았는지 이후에는 볼 수 없었다.


2시간여를 걷고 배고플 때쯤 마을의 바에서 아침을 해결한다. 메뉴는 필수 음료인 콜라와 오렌지 주스에 빵이다. 일주일이 넘어가면서 어느 정도 일종의 패턴이 생긴다. 배낭을 챙길 때, 주문하는 음식들, 숙소에 도착해서의 행동들이 이제 자연스러워진다. 특히 매일매일 첫 휴식지에서 마시는 오렌지 주스는 정말 생명수 같다. (이곳의 식당들에는 생 오렌지를 착즙해 주는 기계가 있어서 즉석에서 금방 만들어 준다.)


잭과 달리아는 전날 휴식하면서 헤어진 후 못 만났고 크리스티앙과도 오전에 엇갈리고 나서는,  길에서 마주치는 순례객들이 몇몇 스쳐 지났던 얼굴을 빼고는 다들 낯선 이들이다. 순례길을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일정으로 걷기 때문에 사실 아는 체를 안 한다고 해도 며칠 지나면 얼굴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저런 사유로 조금씩 앞서 걷다 보니 주로 혼자 걷게 되었다. 이럴 땐 마을과 마을 사이의 10km 이상 되는 장거리 구간이 있는 날은 조금 더 힘이 든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마의 구간은 힘이 든다. 마을 없는 3시간을 지나고 한마을을 더 가기로 했다. 내일 마주할 대도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오늘 최대한 많이 가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Ages에 도착했다. 길 위에서 주워들은 이야기 중에 내일 도착할 대도시에 무슨 큰 축제가 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이전 대도시인 Logrono에서 맘에 드는 숙소에 가지 못한 게 생각나서 숙소의 주인에게 찜해 놓은 숙소의 예약을 부탁했다.


숙소의 젊은 여주인도 그곳에 사람이 많이 몰릴 것이라고 하며 기꺼이 전화를 해줬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숙소는 이미 자리가 없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주소록을 동원해 몇 군데 더 연락을 해 보았지만 다들 방이 없었다. 대도시나 좋은 숙소는 하루 전에 예약도 늦을 수 있다는 교훈을 새로 얻었다. (나는 저렴한 개인방을 주로 원했기 때문이고 도미토리는 웬만하면 하루 전에 예약하면 가능하다.)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내일 부딪혀 보기로 했다.


첫 휴식지에서의 식단은 콜라와 오렌지 주스, 빵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음료는 고정



이런 멋진 풍경이 보일 때마다 불안해지는 마음. 혹시 저걸 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열번째날.





드디어 대도시에 가는 날이다. 드디어 음식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날이다. 잠자기 전에 지도에 버거킹과 KFC를 표시해 놨다. 도시를 오래 즐기기 위해 오늘도 7시 전에 출발한다. 처음으로 안개가 너무 짙게 끼었다. 순례길의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일단 동네의 큰길을 따라간다. 성당이 나온다. 대부분의 순례길은 성당을 지나니까 맞는다고 생각하고 어두운 길을 플래시 하나에 의지해 걷는다.


10분여를 걸었는데도 화살표가 안 나온다. 보통은 길을 잘못 들어도 금방 알아채는데 어둡고 안개까지 있으니 너무 오래 틀린 길을 걸었다. 앱을 보니 경로에서 한참 벗어났다. 꼭 이럴 때일수록 확인할 생각을 못 한다. 다시 온 길을 걸어 마을로 돌아왔다. 지도를 보며 더듬더듬 가다 보니 화살표가 보인다. 완전히 다른 길이었다. 어둠이 걷히며 안갯속에 걸어가는 두 명이 저 멀리 보인다. 긴장했던 마음이 여명처럼 걷혀간다.




부르고스(Burgos)로 가는 중간에 갈림길이 있다. 하나는 외곽으로 가는 길이고 하나는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다.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 조금 빠른 길인데 갈라지는 지점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갈림길이 나오면 짧은 길을 선호하는데 이곳은 메인 화살표를 따라가면 외곽으로 가게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 휴식을 끝내고 걸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동네에 아이들이 나와서 순례객들에게 이것저것을 팔고 있었다. 그 친구들이 나오기 전에 길을 걸은 사람들은 대부분 외곽으로 갔다. 그 친구들이 오면서부터 짧은 길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고 다시 뒤돌아온 크리스티앙을 갈림길에서 만났다. 어제 스쳐간 후 보지 못했고 마을에서도 못 봤는데 다시 마주치니 반가웠다. 하지만 여전히 보폭은 달라서 잠시 후 그는 또 사라졌고 부르고스에서 만나겠지 하는 마음을 가졌다.

한참을 지루한 벌판을 걷다가 드디어 도시의 입구처럼 느껴지는 차들이 빠르게 달리는 도로로 접어들었다. 도시 입구를 한참 걷다가 도시로 들어가는 횡단보도를 하나 남겨두고 신호를 기다릴 때, 같이 기다리던 Y 양을 만났다. 처음에는 횡단보도 앞에서 서로 '올라'로 인사만 하고 신호를 기다리는데 은근 신호가 길었다.


둘이서 서로 뻘쭘하게 신호를 기다리는데 그녀가 먼저 한국 사람이냐고 물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핸드폰 데이터가 없어서 지도를 못 본다며 가고 싶은 숙소가 있는데 지도 좀 봐달라고 했다. 이 지름길은 사실 도시로 들어갈 때까지 화살표가 잘 안되어 있어서 그 길도 찾고, 그녀의 숙소도 찾을 겸 같이 걷기 시작했다. 나름 공부를 많이 해 온 그녀는 나에게 그곳을 추천했고 마침 원하던 곳에 예약을 못했던 참에 일단 같이 가보기로 했다.

숙소는 20명의 소규모였는데 성당에서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숙소의 규칙은 무척 엄격했고 분위기도 경건했다. 시설도 훌륭했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남미에서 온 3명의 아줌마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관리인이 나와 그녀들에게 무언가를 묻더니 그녀들을 돌려보냈다.


그 물음은 어제 어디서 잤고, 이곳까지 어떻게 왔냐는 것이다. 당일 도착한 순례객에게만 숙박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아도 이틀을 잘 수 없고, 버스나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온 사람도 안된다는 것이다. 잠시 후 Y 양과 길 위에서 만나 같이 걷고 있던 P 양이 도착해서 셋이서 함께 그 숙소에서 묵었다.(P 양은 갈림길에서 외곽 길로 가버려서 늦게 도착했다.)


저녁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가 매일 열리고, 숙박비와 식사비는 기부 형태로 운영되었다. 저녁에는 각자 기부한 금액으로 봉사자가 식사를 준비하고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에는 봉사자가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주고 각자의 이야기들도 꺼내 놓았다.

사실 현재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동기는 다들 제각각이다. 이 길의 태생은 종교로 기인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며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이 길을 걷고 있다. 나 또한 그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막상 걷기 시작하면서 '의미', '목적' 등을 떠올리기보다는 그저 버텨내는, 견뎌내는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또한 습성은 변하지 않아 여전히 홀로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으며 그저 빨리 끝내야지 하는 목표뿐이었다. 그런 내게 이 열 번째 날에 주어진 이 시간은 무척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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