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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Jan 30. 2020

이방인의 소울 푸드

  지친 영혼에 안식을 주는 음식을 우리는 소울푸드라 부른다. 멀리 떠나 온 여행도 언제나 마냥 즐겁고 기쁠 수는 없어서 여행자에게는 소울푸드가 정말 하나쯤 필요하다. 호기심 왕성하던 이십대의 나는 매일 다른 음식을 골라 먹는 재미로 여행을 했다. 오늘은 어떤 식당, 내일은 다른 식당, 모레는 또 다른 식당에서 그 나라의 정취가 듬뿍 담긴 새로운 음식을 시험하는 재미로 살았다. 나는 모험을 좋아하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무엇이든 시도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음식에 관해서는 더욱 그랬다. 숨죽이며 내 선택을 기다리는 메뉴판의 수많은 음식들중에서 하나 하나 신중하게 뺄 것은 빼고 남길 것은 남기는 이상형 선택의 순간을 상상해보자. 낯선 언어들의 숲을 손가락으로 헤집다가 마침내, 최종후보에 올라간 몇가지 메뉴를 남겨두고 내리는 마지막 결정의 순간은 얼마나 흥분되고 짜릿한가. 그러다가 운이 좋아 맛있는 요리가 얻어 걸리면 그 날 하루는 종일 기분이 좋다. 훌륭한 선택을 한 내 자신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맛있는 음식이 주는 속이 꽉 채워지는 든든한 안락함을 무기삼아 나는 부른 배를 퉁퉁 두드리며 식당을 나선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여행의 불안도 외로움도 몇 시간쯤 고개를 감춘다. 그야말로 소울푸드였다.
  
  그 시절의 나는 배낭여행족이었다. 한 지역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야 일주일을 넘기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소울푸드는 가변적이었다. 그 날 먹었던 음식 중 제일 맛있었던 것, 일주일동안 여행하면서 먹었던 음식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 등 주변환경과 상황, 그리고 운에 따라 소울푸드는 늘 변했다. 정말 맛있어서 기억나는 음식들도 있고 반대로 정말 맛이 없었지만 그 날의 기억이 하도 강렬하여 머리에 절로 각인된 것들도 있다. 하루는 돈이 없어서 베네치아 어느 골목길에서 2유로 주고 산 손바닥만큼 작은 피자 한조각과 가방에 들어있던 바나나 한 개가 그 날 먹은 것의 전부였다. 전날 새벽에 일주일 치 기차표를 잘못 예약했다는 사실과 그 티켓들이 환불이 안 되는 세일상품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를 헛갈려 입력회수 초과로 카드 사용이 막혀버린 상황이었다. 가지고 있던 적은 현금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 그 피자와 바나나였다. 그 때는 그거라도 먹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무더위를 피해 찾아 들어간 영국 요크셔 지방에 어느 시골 마을의 피쉬 앤 칩스도 생각난다. 간판도 없어 정말 동네에 아는 사람들만 맥주 한 잔씩 하러 들르는 작은 식당이었다. 생선살을 발라 튀김옷을 입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튀겨내는 생선요리를 상상하고 시킨 메뉴는 생전 처음 보는 비쥬얼로 나와 일행을 당황시켰다. 명절 제사상에 오를법한 생선 찜 요리가 나왔는데 지금껏 본 대구(생선)중 가장 크고 살이 통통했다. 그 커다란 생선을 통째로 접시에 턱하니 무심하게 올렸는데, 또 그 옆으로는 아기 손톱만큼 앙증맞은 레몬 두 세 조각을 차곡히 정성스레 쌓은 모양이 어쩐지 우스꽝스럽고 당황스러워 식탁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분명 찜요리인데 갓 잡은 생선을 그대로 회로 떠서 초간장에 발라 먹어야 할 것만 같은 인상이랄까. 그 옆에 노릇하게 튀겨 낸 감자튀김을 보면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 이거 피쉬 앤 칩스였지!

  또 언젠가 스페인에서 스테이크를 해 먹어 보리라고 산 두툼한 고기가 실은 베이컨덩어리였던 것도 생각난다. 양초와 와인, 아스파라거스, 상추, 후식으로 먹을 치즈와 과일까지 예쁘게 셋팅을 마치고서 우아하게 썰어 한 조각 씹어 넘긴 염장된 베이컨의 몸서리쳐지는 짠 맛! 이게 뭔가 싶어 몇 번을 더 씹어 보아도 도저히 이것은 베이컨일수 밖에 없구나 싶었던 극장의 그 짠맛! 그 베이컨덩어리도 잊을 수 없는 소울푸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날 저녁식사는 나의 혀가 스페인 여행을 통틀어 가장 강렬한 맛을 경험한 날이며, 생각하면 창피함에 웃음이 나지만 또 가장 나다운 에피소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헛똑똑이인 내가 그렇지 뭐 싶고, 또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사는 것이 여행이나 인생이나 비슷한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울푸드는 음식 자체의 맛 보다는 그 음식과 함께한 소중한 경험과 느낌들, 우리의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생명력을 얻고 특별해진다. 그래서 여행자에게는 여행지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현지음식이 아니더라도 무엇이든지 소울푸드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흔한 길거리 음식들, 마트 과자들,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예상 가능한 친숙한 맛, 전 세계 어딜 가나 있는 터키음식들, 혹은 집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한식과 팩소주도 가능하다.
  
  1. 집 근처 아시안 푸드 레스토랑의 베트남 쌀국수(닭고기) 2. 마찬 가지로 집 근처의 유명 이탈리안 체인 레스토랑 3. 역방향으로 10분정도 걸어 나가면 보이는 인기 절정 터키 음식점의 훈제 닭고기와 소시지, 샐러드 요리들 4. 그리고 맥주, 아 맥주! 나의 맥주! 이상이 나의 독일생활 소울푸드들이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이것 이상은 없다.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다. 독일 음식은 독특한 정체성이 부족하다. 사실 유럽 내에서는 이것 저것 다 비슷한 음식을 먹어서 딱 그 나라만의 정체성을 가진 음식들이 대중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프랑스사람들도 매일 푸와그라를 먹겠는가? 그들이 공기처럼 매일 먹는 것은 사실 빵이다. 이건 스페인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스페인 아빠들은 매일 아침 가족이 잠든 틈을 타 새벽의 아침이슬을 밟으며 그 날 갓 구워낸 첫 빵을 사러 간다. 영국도 덴마크도 그 외에 다른 유럽 국가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독일 전통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도 분명 있지만, 매일 그런 기름진 고기음식을 즐기는 것은 마치 한국사람이 팔보채를 매일 먹는 격이다. 한국인의 밥상에 매일 올려지는 밥과 국에 비유되는 독일 음식은 감자와 빵이다. 특히 빵은 정말 종류도 다양하고 함께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잼이나 소시지, 치즈가 많아 간단한 한끼 식사로 적당하다. 그런데 이 빵이라는 것도 사실 유럽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재료나 식감에서 독일빵만의 독특함을 몇 가지 찾을 수는 있겠지만, 제아무리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고 새로운 배합의 샌드위치 조합을 만들어 내더라도 결국에 빵은 빵이고 샌드위치는 샌드위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몇 번 베어 물고 나면 끝나는 패스트푸드의 느낌, 위장을 좀 더 뜨끈하고 든든하게 기름칠하고 싶은데 이 빵이라는 놈은 목구멍을 거쳐 배꼽 위 언저리로 똑, 야속하게도 벌써 끝나버렸다. 나의 미각은 이제 막 살아나는 중인데 나의 식사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입 안에서는 이제 온갖 맛의 감각들이 마구마구 고개를 쳐드는데, 이 아이들을 풀어줄 놀이터가 독일 땅에는 없다.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끝이 나버린 밥 시간, 그래서 나는 독일음식에서 소울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소울이 서서히 딱딱해져가는 느낌마저 받았으니까, 내가 독일 음식과 궁합이 맞지 않다는 것은 이제 충분히 아셨으리라. 삼시 세끼 외에는 간식을 일절 먹지 않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식사시간이 정말 소중하다. 별 것 없는 음식도 가짓수를 몇 가지 갖추어 제대로 느긋하고 든든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 나처럼 밥순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이런 한 끼 식사에 대한 아쉬움이 채워지지 않다보니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것이 초콜릿이나 쿠키들이다. 실제로 독일 사람들은 간식을 자주 먹는다. 누군가는 날씨가 우울해서 그런다고 하지만, 나는 부족한 한 끼 식사의 허함을 달래기 위한 본능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입의 욕구를 풀기 위한 원초적인 생존전략말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고수를 싫어하는 내가 고수가 듬뿍 담긴 강렬한 베트남 쌀국수를 좋아하게 될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예전에 태국 여행을 갔을 때 유일하게 공들여 배운 단어가 ‘고수’의 태국말이었다. 음식을 주문할 때 그걸 빼 달라고 말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이 곳 독일에서 고수의 향이 진하게 남은 뜨끈한 국물을 한 번 들이키고 나니, 그게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독일에서는 의외로 따뜻한 음식을 먹을 기회가 없다. 특히 이렇게 국물을 홀짝 홀짝 들이킬 수 있는 음식은 정말 없다. 야들야들한 식감이 일품인 닭가슴살을 듬뿍 얹은 이 국수 한그릇은 이번 독일 여행에서 내가 좀 덜 괴팍하고 덜 냉소적인 수 있도록 하는 정신안정제같은 역할을 한다. 여러가지 이유들로 짜증이 나고 우울했을 때, 그래도 집 근처에 이 베트남 쌀국수집이 있다는게 마치 근처에 우리 엄마집이 있다는 느낌과 비슷했다. ‘여차하면 엄마한테 가서 쉬다 오면 되니까, 엄마한테 부탁하면 되니까’ 하는 딸내미의 마음으로 나도 이 동네에서 도저히 먹고 싶은게 생각나지 않으면 이 쌀국수집에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쌀국수집 사장님은 내가 이렇게나 진득하게 자기네 식당에 마음을 비벼대는줄 모르시겠지.

  적어도 그 가게에 가면 실패할 확률이 없는 완벽한 국수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다. 맛도 맛이지만 내가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이 불안하고 애매한 소속감을 적어도 그 가게에서 만큼은 내려놓을 수 있다. 한국 이민자들이 해외어디서나 한인사회를 만들고 그 속에서 유대관계를 형성하려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들은 외롭고 불안해서 그런 것이다. 멀리 타국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목소리에 힘을 더해줄 동료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쌀국수 한그릇이 사람을 이렇게 포용적이고 너그럽게 만든다니! 온갖 종류의 집단주의를 싫어하는 나이지만, 그 소속감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들이야. 홀짝홀짝. 바깥은 춥지만 여기는 따뜻하다고. 홀짝홀짝. 너네가 이 국물 맛을 몰라서 그러는데, 일단 한번 경험하고 나면 너네가 먹는 그 스튜나 스프따위는 비교가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라구. 호로록. 고기나 샐러드나 빵이나 시리얼이나 감자만 먹지 말고, 여기 와서 이것 좀 먹어봐. 호로록. 아 참, 당신들은 내 말을 못 듣는군. 홀짝홀짝. 하긴 여기 이곳이 사람들로 붐비는 건 나도 바라지 않는 일이야. 후루룩. 그러니까 이건 우리만의 비밀로 해 두지. 내가 오늘 여기에 온 것도 비밀이야. 아뿔싸, 얼마 안 남았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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