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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Jan 23. 2020

독일의 단어, ‘힘’

  예전에 읽은 어느 책에서 작가는 외국인 친구들과 둘러앉아 각 나라별 도시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단어를 하나씩 말해보는 게임을 했다. 런던은 ‘고루하다’, 스톡홀롬은 ‘순응’, 뉴욕은 ‘야망’ 혹은 ‘매연’, 로마는 ‘섹스’! 뭐 이런 식이다. 그리고 요즘 조승연작가가 연작으로 파리와 뉴욕같은 대도시들의 매력을 하나의 형용사로 재조명하는 책을 두어 권 내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는 ‘시크’하고 뉴욕을 ‘리얼’하다고 했다. 하나의 도시가 갖는 전반적으로 두드러진 이미지를 절묘한 한 단어로 규정하는 것이, 누군가는 자칫 섣부르지 않나 하겠지만, 나는 그런 시도들이 재미있다. 우리가 경험한 다양한 단어들을 하나로 합쳐 문장을 만든다면 참신할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서울은 ‘치열’하고, ‘붐비고’, ‘차갑다’, 그러나 서울은 ‘활력’이 넘치고 ‘가능성’이 있으며 ‘발전’하는 중이다. 이렇게 말이다. 후훗, 친구들과 기회가 되면 이런 게임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 발제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결혼이란?’, ‘사랑이란?’, ‘돈이란?’ ‘친구란?’ 등등.       


  오늘은 서론이 조금 길다. 나는 독일을 정의하고 싶었다. 실은 단어들이 며칠 전부터 계속 머릿속을 빙빙 돌아다녔다. 좀 더 검열하여 내 말을 객관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데이터가 쌓이면 그 단어들을 내어놓으리라. 아직은 독일에 대해서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다가 어느 순간에 ‘에잇, 말이라는 것은 본래 주관적이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이제 그 단어들을 풀어 놓으려 한다. 그러면 속이 좀 후련해질까. 나는 이 단어들의 생경함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또 다른 단어들을 찾아주어, 우리가 좀 더 이 독일이라는 나라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정말 반가울 것이다.      


  나의 단어는 ‘힘’이다. 파워, 파워풀, 스트롱 등등 다 비슷한 말이다. 나에게 독일은 ‘힘’찬 나라다. 무엇이든 이 ‘힘’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지천에 깔렸다. 우선 사람들의 생김새부터 시작해보자. 독일 사람들은 노르웨이나 스웨덴 등 진짜배기 북유럽 국가들의 사람들에 비해 체형이나 골격이 그리 크지는 않다. 키도 그만하면 적당하고 근육량도 태어나기를 특출나게 많이 가지고 태어난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이 하나같이 다들 튼튼해 보인다. 전반적으로 마른 체형은 그리 많지 않고, 누가 보더라도 사십, 오십대의 아저씨들이 아니고서야 뱃살이 나온 사람도 적다. 다시!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 뱃살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을 테니, 건강이 염려되는 정도의 부풀어 오른 배를 바지에 우겨 넣고 힘겹게 걷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살갗이 뼈에 찰싹 달라붙어 있고, 잘 가꿔온 탄탄한 근육이 완벽한 힘줄들에 지탱을 받는 한 그루의 튼튼한 가로수 같다는 인상을 준다. 며칠 전 독일 북부의 함부르크 너머 국경지방에서 보았던 진짜배기 북유럽 사람들은 정말로 침엽수림 같았다. 그러니까 독일 사람들은 그냥 가로수 정도로만 해두자. 어찌 되었든, 그들은 나무를 닮았다. 단단한 생활의 근육들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뿌리가 되어 남자건 여자이건 탄탄하고 힘이 넘치는 에너지원을 갖고 사는 것 같다.      


  독일 사람들은 운동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운동은 선택이 아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선 독일의 날씨는 사람을 우울하게 하기 십상이다. 햇빛이 드는 날을 손꼽을 정도로 대부분 채도가 낮고, 쌀쌀하고, 어둡다. 하늘에서는 누가 침을 뱉듯이 비가 툭툭 내리기도 한다. 영국사람들은 이런 날씨를 ”It’s spitting.“ 이라고 한다. 머리에 침을 톡톡 맞는 것 같이 비가 온다고 할 순 없지만, 비가 오는 것 같은 그런 날씨 말이다. 독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산은 정말 쓸 필요가 없다. 침 몇 방울 피하자고 커다란 우산을 펼치는 꼴이 어쩐지 우스울 것 같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독일에서(영국도 비슷한 것 같다.) 유명한 것이 기능성 좋은 바람막이다. 방수기능 탁월하고 활동성이 좋으며, 크고 작은 포켓들을 장착한 가벼운 기능성 점퍼들이 심지어 저렴하기까지 하다. 브랜드별로 그런 제품들이 흔하기 때문에 세일을 많이 한다. 특히 부활절 같은 정기 세일기간에는 정말 좋은 기능성 아우터를 저렴한 가격에 득템할 수 있다.      


  날씨가 연중 안 좋으니까 금새 우울이 찾아온다. 실제로 나는 이틀 전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무기력과 우울의 늪에 빠져 남편을 힘들게 했다. 글을 쓴다는 핑계로 집 밖을 나가지 않은 날이었다. 사람에게는 정말 햇빛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날 알았다. 이런 날씨에 바깥 공기를 쐬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 정말이지 내가 임마누엘 칸트가 된 것 같이 사색적이고, 철학적이고, 심오해진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우울해진다.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그렇게 되더라.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흥이 나질 않고, 어쩐지 잠은 오지 않아 답답했다. 남편도 작년에 독일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나름대로 심각한 우울증과 향수병에 시달렸다. 휴, 나는 고작 하루뿐인데도 정말 미치겠더라. 라이프 밸런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날이었다. 미세먼지는 심하지만 밖에 나가면 어디서나 해를 마주할 수 있는 한국은 그런 의미에서 정말 축복받은 땅이다.     


  독일인들은 이 기능성 아우터를 장착하고 열심히 달리기를 한다. 일본 유명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를 그렇게 열심히 한다지? 그는 달리기의 장점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꼽았다. 이렇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에 나와보니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다. 특별한 도구를 갖추지 않고, 누군가에게 애써 부탁하고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그냥 옷 한 벌 툭 걸치고 운동화 끈을 홱 졸라매면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이 ‘달리기’뿐인 것 같다. 하다못해 요가도 요가 매트가 필요하다. 달리기는 튼튼한 몸만 있으면 된다. 실용성을 중시하고, 맥주를 사랑하는 독일인들은 온 동네 거리 거리를 열심히 달린다. 이 점도 독일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사실 유럽사람들은 조깅이 어느 정도 생활화되어 있다. 예전에 런던을 여행하던 중, 그 시끄럽고 혼잡한 시내의 교통체증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도로 옆을 달려 나가던 한 무리의 러너들이 생각난다.      


  독일인은 자전거의 민족이다. 이들의 자전거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한 사람이 두, 세 개씩의 자전거를 보유하는 경우는 흔하다. 평소에는 가족과 오붓하게 외식하는 것도 절제하며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인 그들이지만, 자전거만큼은 비싸고 튼튼한 것으로 장만하는 이들이 독일인이다. 자전거는 시민들의 생활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도시마다 트램도 있고, 버스도 있고, 자동차를 모는 사람도 많지만 내가 보기에 자전거 이용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다. 그들은 출퇴근할 때,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 운동할 때 등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전거를 두고, 자전거와 함께 호흡한다. 자전거를 타는 것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이 없다.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누구나 자전거를 몬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자전거는 ‘낭만’과 ‘꿈’의 꼬꼬마 어린이 시절을 떠올리게하는 추억의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사이클이라는 엄연한 스포츠로서의 자전거 타기 활동도 있으나, 여기서 내가 ‘자전거’라 부르는 것은 사이클용 자전거가 아니다. 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못생긴 네 발 자전거, 부모님이 자꾸만 우리의 등 뒤를 밀어주시며 ‘옳지, 옳지’ 하시던 그 추억속의 자전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대여용 자전거, 그런 흔한 자전거를 이 곳 독일에서는 공기처럼 언제든,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독일사람들은 자전거를 꾸미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자전거에 무엇이든 싣는 것을 좋아한다. 자전거에는 최대 4개까지 자전거 가방을 실을 수 있다. 색깔도 독일스럽게 우중충한, 그러나 100년은 거뜬히 쓸 것 같은 이 튼튼하고 못생긴 가방을 자전거 뒷바퀴에 장착하고, 그들은 장을 보러 간다. 저 가방안에는 무엇이 담겼을까? 어린아이 키만큼이나 큰 가방을 들쳐 메고 자전거를 모는 사람도 보인다. 남편의 직장동료는 이 투박한 자전거 가방을 10년째 쓰고 있다고 한다. 저 많은 짐을 싣고 좁은 자전거 도로를 쌩쌩 달리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독일인의 민첩하고 강인한 운동신경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독일사람들은 아이가 아주 어렸을때부터 자전거 타기를 교육시킨다. 엄마는 자전거로 아이들을 등하교시키고, 아이가 자전거를 스스로 탈 수 있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을 자전거에 노출 시킨다. 그래서인지 독일인치고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그들은 아주 빠른 스피드로, 보행자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웬만해서는 멈추지 않고 제 갈 길을 갈 수 있는 자전거 타기의 장인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힘주어 말한다. 절대 큰소리를 내는 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웅엉거리지도 않는 것 같다. 엄청나게 진지해 보일 때가 많지만 어쨌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목소리에서 단전 깊은 곳의 자신감이 들린다. 글쎄, 이것을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안정감이고 불러야 할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철저히 개인적이면서도 자존감은 높은 사람들인 것 같다. 그 콧대 높은 자존감의 뿌리는 무엇일까? 이는 좀 더 공부하고 관찰해볼 요량이다. 독일인들은 질서를 중요시하고, 너와 나의 공존을 중요시하고,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제도적 테두리 안에서 안정감을 찾는다. 실제로 많은 시스템이 아직 한국의 70년대, 80년대에 머물러 있어 보일 만큼 변화에 둔감하고, 혹은 변화를 싫어하고, 보수적이며 고지식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그다지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일인들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국민의 행복지수로는 전 세계 국가 중 꽤 상위권에 들 것이다. (실제로 찾아보니 정말 그렇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좀 재수가 없을 만큼 콧대가 높고 자신감이 넘친다.      


  주어진 일은 철저하게 해내고, 무엇이든 대충하는 법이 없는 성실한 독일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전 세계인이 알아주는 질 좋은 공산품과 멋들어진 자동차 브랜드를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그들이 물건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정말 존경스러운 부분이기는 하다. 여기 이 호텔방의 흔한 주방집기들, 전구들, 수건들, 의자들 무엇 하나 튼튼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이 의자는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허리에 전혀 무리가 오지 않는다. 내가 매일 사용하는 이 수건들은 아무리 써도 먼지 한 톨 묻어나오지 않는다. 직조감이 정말 탄탄하여 호텔직원을 구슬려 브랜드명을 알아내고 싶을 지경이다. ‘메이드 인 젊은이’라면 한번 더 들여다보고 무조건 신뢰가 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신뢰성 백프로의 이미지를 구축해 낸 민족이니 실은 엄청나게 명석하고 약삭빠른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한국 전래동화 ‘토끼와 거북이’에서 독일은 굳이 따지자면 거북이를 닮았다. 세계화의 트랜드에 발 맞추어 걸으려면 한참 멀었다. 심지어 그들의 걸음걸이는 너무 무겁다. 그들은 좀처럼 세계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살피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모두가 더불어 사는 인류애적인 관점에서 독일인들이 세상을 좀 더 세심하게 관찰하고, 주변에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평화롭고 조용하고 안정적인 것이 좋긴 하지만, 어쩐지 성격이 급한 나는 이대로만 살면 정신병에 걸릴 것만 같다. 지금이야 당장 큰 문제가 없겠지만 이렇게 혼자 뚝심있게 자존감만 내세우고 있다가 언젠가 가진 자원이 바닥나는 순간에는 과연 독일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 삶의 질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삶의 스펙트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들이 깨달았으면 한다. 그들은 풍부한 경험이 가져다주는 확장된 사고와 유연한 마음의 자유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앗, 쓰다 보니 결론이 사뭇 부정적이다. 나는 물론 꾀를 부리지 않고 근면하고 성실한, 튼튼이 거북이도 좋아한다. 그것이 독일이 가진 저력이고 무시할 수 없는 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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