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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Jan 20. 2020

창문을 열어 봅시다

  잠깐씩 볼일을 보러 나갈 때를 제외하고 나는 하루의 반나절을 꼬박 호텔방에서 글을 끄적이거나, 밍그적거리며 책을 뒤적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여기 브레멘은 대도시가 아니라서 스타벅스같은 카페에서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유럽 어디나 그렇겠지만 카페는 한 끼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려고 모여드는 사람들, 동네친구들과 커피 한 잔씩 시켜두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뿐이다. 여태껏 이 동네 카페에서 일을 하겠다고 책이나 노트북따위를 펼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 물론 신문을 본다거나 상념에 잠겨 무언가를 종이 위에 끄적이는 사람들이 간혹 있으나 돈벌이로 하는 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같은 무보수 프리랜서에게 달리 나가서 일할 곳이 없다는 것은 조금 불편해 보일 수 있겠으나, 사실 나는 거리에서 배회할 시간을 줄여 집중적으로 글을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서 좋다. 관광하기 위해 떠나온 여행이 아니었으므로 사실 이런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좋다. 자연스럽게 나는 남편과 같이 새벽에 기상하여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한 후, 카푸치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하러 나갔다가 돌아와서, 싱크대옆 작은 식탁으로 출근하여 노트북을 펼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아침 새로운 카페를 기웃거리며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커피 맛을 비교하는 것이 나의 진지하고 즐거운 아침 루틴이 되었다.

  이곳에 도착하고 며칠은 호텔방의 창문을 꼭 닫아두었다. 남편이 한바탕 요리를 신나게 하고 나면 잠깐 환기를 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벌레 공포증도 심하고 프라이버시도 굉장히 신경을 쓰는 은둔형 생활자라서, 낯선 곳에서 창문을 열어 두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덩치로는 비교가 안되게 우위에 있지만, 벌레라도 한 마리 들어온다 치면 아마 난리가 날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목만 조금 빼어 보면 건너편 가게의 이층집 안 살림이 뻔히 내다 보이는데,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 아닌가. 워낙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지금 가진 모든 물건들은 나에게 정말 소중하다. 견물생심이라고 낯선 이방인의 공간을 쉽게 노출시켜서 득이 될 것 없다. 부산 사투리를 빌리자면 ‘꼬롬한’(사전을 찾아보니 표준어로는 ‘마음에 걸려 언짢은 느낌’) 생각을 하면서 나는 창을 여는 대신에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튼다. 아침의 활력을 담은 경쾌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면서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좋다. 그러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밖을 살피면 그 날의 날씨나 거리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 나는 점심을 사 먹으러 익숙한 거리로 길을 나섰다. 마트에서 산 재료들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던 것에 지쳐 자극적인 길거리음식을 먹고 싶었다. 전날 퇴근한 남편이 내일은 호텔 앞 사거리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둔 날이었다. 늘 마주치는 청소부원이 독일은 매우 안전한 국가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근교에 사는 농부들이 트렉터를 몰고 와 무엇인가에 대해 항의를 하는 조용한 시위라고 했다. 그들이 무엇에 대해 항의를 하는지 궁금했으나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영어로 질문을 했고, 그 청소부원은 나의 영어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여태껏 이름을 물어보지도 못했다. 또 한 번 마주치면 꼭 물어볼 것이다.)

  조용할 것이라 예상했던 거리는 여태껏 본 적 없는 인파로 매우 붐볐다. 독일스럽게 데모는 매우 조용하게 진행된 듯 했지만, 이 작은 동네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든 것은 처음이었다. 때마침 합세한 직장인들과 가족의 손을 잡고 나온 각국의 관광객들, 유니폼을 맞춰 입은 시위대로 도시는 그 어느때보다 경쾌했다. 나만큼이나 재미없고 진지한 종족이라고 생각했던 독일 사람들이 그렇게 활력넘치는 모습으로 즐겁게 거리를 점령한 모습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평소에 의자를 내어 놓지 않던 카페들도 어디에 그 많은 테이블을 숨겨 두었는지, 거리의 절반을 멋들어진 야외석으로 채워 놓았다. 싱그럽고 유쾌하고 들썩이는 분위기, 깨끗한 하늘과 시원한 날씨, 좋은 날이었다.

   샌드위치를 담은 종이 봉투를 한 손에 말아 쥐고, 한쪽 손은 외투에 푹 찔러 넣고서 나는 계획에 없던 점심산책을 시작했다. 그저 사람들을 구경하는것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이 되었다. 여태껏 호텔에 쳐 박혀 있던 오전의 시간이 아까웠다. 둔탁한 독일어가 사방으로 들려오고, 떼를 쓰며 우는 아이들의 소리, 손을 꼬옥 잡고 걷는 연인들의 달콤한 속삭임들, 상점안을 들여다 보는 관광객들의 중얼거림, 왜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시위대의 왁자지껄함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걸었다. 예쁜 그림을 들여다 보듯이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들을 관찰했다. 그 날은 길을 잃지도 않았다. 앞에 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따라 걷다 보니 다 익숙하고 알 것 같은 길들이 이어졌다. 교회와 오래된 시청건물, 구시가지로 둘러싸인 광장까지 금새 다다랐다. 낯설지만 안전한 느낌, 혼자인데 함께라는 느낌이 들었고 분명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많은 것이 나와 닮은 듯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꽃집에 들러 꽃을 샀다. 매번 그 가게앞을 지나며 눈독을 들이던 튤립 중에서 예쁜 분홍색으로 한 다발을 골랐다. 꽃 시장이 매우 크다는 네덜란드가 근처에 있어서 그런지 꽃값이 한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렴했다. 한 손으로 가득 움켜쥘 만큼의 꽃 한다발을 오천원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에 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강렬한 색깔의 꽃들과 야자나무들, 선인장들이 하나같이 예뻐서 돈의 여유가 되는 만큼 전부 사서 짊어지고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파 한 단처럼 굵은 튤립줄기를 움켜쥐고 호텔방에 있던 계량 컵에 물을 받아 나의 생애 첫 튤립들을 꽂았다. 이 호텔에 숙박하는 사람들 중 계량컵까지 써가며 신중한 요리를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유용하고 나름 시크한 매력을 발산하는 꽃병으로 쓰일 줄이야. 역시 인생은 무엇이든 속단을 하면 안 되나 보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창문을 열어둔다. 하루종일 집을 비울 때를 제외하면 거의 반나절 이상 창문을 활짝 열어둔다. 음악도 틀지 않는다. 익숙한 한국 음악을 듣는 대신에 거리에서 들려오는 갖가지 다채로운 소리들을 배경삼아 글을 끄적이는 것이 좋다. 오전 8시쯤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쓰레기차의 크고 경쾌한 엔진소리, 가게 문을 여는 사람들의 조용한 움직임들, 자동차 소리, 자전거의 경적소리, 카페에서 이른 아침의 회동을 갖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주고 받는 인사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벌레쯤은 들어와도 괜찮을 것 같다. 손으로 휙 쫓아 버리면 되고 정 안되면 저녁에 남편에게 잡아 달라고 하면 될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느끼는 것이 좋아졌다. 시원한 독일 북부지방의 찬 바람을 느끼면서,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관찰하고, 퇴근한 사람들이 거리로 하나 둘 모여드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아졌다. 구급차의 삐뽀삐뽀 소리를 들으면 짧게나마 누군가를 걱정하고, 큰 소리로 통화를 하는 사람의 격앙된 목소리를 들으면 과연 무슨 얘기를 저리 하는 걸까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 글을 쓰고 싶었다. 나처럼 세상살이에 소극적이고 겁이 많은 누군가에게, 이름 모를 동반자들에게 나는 음악을 듣는 대신 창문을 열어두면 어떨까 권유하고 싶다. 내가 경험해보니 생각보다 세상이 그리 위험하지 않으며,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 많더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웅크리는 사이에도 바깥은 풍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노라고 말하고 싶다. 일단 창문을 열어 두는 것으로 스타트를 끊으면, 세상과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친절해 질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좀 더 당당하게 마주하고 싶다면 오늘 이 작은 집의 창문부터 열어 보자. 그러다 보면 걷는 것도,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사람들의 표정을 너그럽게 살피는 것도 쉬워 질 것이다. 지금 내 방에 예쁘게 피어 있는 튤립 한다발이 나의 증인이 되어 주었듯이, 걷다보면 당신도 당신의 증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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