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절을 꼬박 넘기는 장거리 비행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코노미석의 다닥 다닥 붙은,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좌석 배열은 여행의 시작도 전에 나를 얼마쯤 지치게 한다. 앞으로 이곳이 나의 전쟁터구나. 하아. 내 자리를 찾아 좁은 비행기 복도로 걸어 들어갈 때면, 나는 비장해진다. 잘 버텨 보리라! 무릎이 덜 아프도록 틈틈히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이번엔 셋 중 중간에 끼인 좌석이니까 물도 많이 마시면 안되겠군! 드디어, 나의 작고 치열한 무덤, 19B를 발견했다! 앉기가... 싫다.
언젠가 내 인생에도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에서 발 뻗고 편안하게 비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다음 번 여행 목표는 미국인데, 지금 쌓인 마일리지 상태로 봐서는 당분간은 비즈니스석은 커녕 허리띠를 졸라 메고 여행경비부터 열심히 벌어야 할 것 같다. 생계형 노동자에게 백만원이 넘어가는 장거리 비행의 이코노미석 좌석도 사실 감사한 일이다. 양 어깨에 힘을 주어 최대한 나에게 할당된 자리 이상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긴장을 하며 앉아 본다. 이렇게 의자에 몸을 우겨 넣고 있을 때면 문득 동양인보다 훨씬 체격이 큰 서양인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옆자리 외국인에게 동정어린 시선을 날려본다. 몰래, 살짝. 그러고나면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서른을 넘기면서 나는 전에 없던 비행기 공포증이 생겼다. 고소공포증도 있고, 못 먹는 음식도 많고, 이제는 비행기 공포증까지 생겨버려서, 이렇게 살다간 점점 스쿠루지 할멈이 되는 것 아닌가 싶어 조금 걱정이 된다. 아마도 철 없이 그저 놀기 좋았을 때보다 소중히 지키고 싶은 것들이 점점 많아져서 그런 것 같다.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의 생활철학까지는 못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가진 것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사람이고 싶은데, 어려울 것 같다. 서른 해를 넘게 살면서 본 재난영화가 차곡차곡 기억속에 쌓여서 공포가 더 극대화되는 것도 같다. 사실 나는 로맨스영화보다는 재난영화를 더 즐겨 본다. 히어로물도 지구가 얼마쯤 파괴되고, 공격받고, 선량한 시민들의 목숨이 위협받는 아주 극적인 상황연출을 좋아한다. 비행기공포증은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미디어 중독자인 내가 다 자초한 일이다.
이번 비행은 네덜란드 항공사의 편명을 대한항공이 코드쉐어 한다. 작은 텔레비젼 화면에도, 키 크고 코 크고 컬러풀한 헤어의 승무원들도, 기내식의 한식도 온통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를 가본 적은 없지만 썩 첫 인상이 좋지 않다. 고추장이 빠진 비빔밥을 생식하듯이 먹었다. 승무원 언니가 ‘치킨 오어 비프?’라고 물었을 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비프를 주문했다. 좀 더 신중하게 대답할 걸 그랬다. 다음부터는 먼저 말하는 것을 무조건 시켜야지, 나중에 말하는 것은 맛이 없나 보다. 나와 오늘 비행을 함께 하는 여기 수많은 외국인 전우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사람일 것이다. 주위를 둘러본다. 난데 없는 호기심이 발동해서 사람들의 면면을 찬찬히 살핀다. 그런데 나는 도통 ‘알아치리는’ 센스는 없나 보다. 내 눈엔 그냥 다 ‘외. 국. 인’이다.
비행기가 뜬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 장기는 저기 땅 위에 고히 내려 놓고 빈 껍데기인 육체만 부웅 떠오르는 느낌, 토하기 직전의 울렁거리는 딱 그 느낌이다. 제발, 무사히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게 해주세요. 곁눈질로 보니 뒷자리에 앉은 외국인 아저씨는 성호를 긋고 짧게 기도를 한다. 나는 조금 있다가 기도를 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은 등받이에 최대한 릴렉스하고 온 몸을 의자에 맡긴다. 심호흡을 하고 싶다. 심호흡을 몇 번 하면 긴장이 조금 눌러지는 것 같다. 바람에 흔들 흔들 이 작은 기계 덩어리와 비행크루들에게 나의 목숨을 온전히 기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비행기가 미사일 맞아서, 극심한 기상악화로 엔진에 결함이 생겨서, 조종사가 갑자기 정신이상으로 ‘우리 다 같이 죽자!’식의 범죄적 이상 행동을 보인다면? 별별 생각을 다했다. 정말 영화를 많이 본 것 같다.
안전하게 비행기가 이륙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작게 내쉬며 남편 몰래 성호를 긋고 기도를 했다. 이런 것쯤은 겁내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남편이 어깨를 툭 친다. 방금 뭐 한 거냐며 놀릴 거리를 잡은 듯, 장난스러운 혹은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다행이다. 이렇게 아무일 없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지금 여기 한 작은 시가지 호텔방에서 글을 끄적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나는 지금 무사히 독일에 안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