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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Jan 17. 2020

장거리 비행을 시작하는 자세

  반나절을 꼬박 넘기는 장거리 비행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코노미석의 다닥 다닥 붙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좌석 배열은 여행의 시작도 전에 나를 얼마쯤 지치게 한다. 앞으로 이곳이 나의 전쟁터구나. 하아. 내 자리를 찾아 좁은 비행기 복도로 걸어 들어갈 때면, 나는 비장해진다. 잘 버텨 보리라! 무릎이 덜 아프도록 틈틈히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이번엔 셋 중 중간에 끼인 좌석이니까 물도 많이 마시면 안되겠군! 드디어, 나의 작고 치열한 무덤, 19B를 발견했다! 앉기가... 싫다.

  언젠가 내 인생에도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에서 발 뻗고 편안하게 비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다음 번 여행 목표는 미국인데, 지금 쌓인 마일리지 상태로 봐서는 당분간은 비즈니스석은 커녕 허리띠를 졸라 메고 여행경비부터 열심히 벌어야 할 것 같다. 생계형 노동자에게 백만원이 넘어가는 장거리 비행의 이코노미석 좌석도 사실 감사한 일이다. 양 어깨에 힘을 주어 최대한 나에게 할당된 자리 이상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긴장을 하며 앉아 본다. 이렇게 의자에 몸을 우겨 넣고 있을 때면 문득 동양인보다 훨씬 체격이 큰 서양인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옆자리 외국인에게 동정어 시선을 날려본다. 몰래, 살짝. 그러고나면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서른을 넘기면서 나는 전에 없던 비행기 공포증이 생겼다. 고소공포증도 있고, 못 먹는 음식도 많고, 이제는 비행기 공포증까지 생겨버려서, 이렇게 살다간 점점 스쿠루지 할멈이 되는 것 아닌가 싶어 조금 걱정이 된다. 아마도 철 없이 그저 놀기 좋았을 때보다 소중히 지키고 싶은 것들이 점점 많아져서 그런 것 같다.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의 생활철학까지는 못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가진 것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사람이고 싶은데, 어려울 것 같다. 서른 해를 넘게 살면서 본 재난영화가 차곡차곡 기억속에 쌓여서 공포가 더 극대화되는 것도 같다. 사실 나는 로맨스영화보다는 재난영화를 더 즐겨 본다. 히어로물도 지구가 얼마쯤 파괴되고, 공격받고, 선량한 시민들의 목숨이 위협받는 아주 극적인 상황연출을 좋아한다. 비행기공포증은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미디어 중독자인 내가 다 자초한 일이다.

  이번 비행은 네덜란드 항공사의 편명을 대한항공이 코드쉐어 한다. 작은 텔레비젼 화면에도, 키 크고 코 크고 컬러풀한 헤어의 승무원들도, 기내식의 한식도 온통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를 가본 적은 없지만 썩 첫 인상이 좋지 않다. 고추장이 빠진 비빔밥을 생식하듯이 었다. 승무원 언니가 ‘치킨 오어 비프?’라고 물었을 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비프를 주문했다. 좀 더 신중하게 대답할 걸 그랬다. 다음부터는 먼저 말하는 것을 무조건 시켜야지, 나중에 말하는 것은 맛이 없나 보다. 나와 오늘 비행을 함께 하는 여기 수많은 외국인 전우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사람일 것이다. 주위를 둘러본다. 난데 없는 호기심이 발동해서 사람들의 면면을 찬찬히 살핀다. 그런데 나는 도통 ‘알아치리는’ 센스는 없나 보다. 내 눈엔 그냥 다 ‘외. 국. 인’이다.

  비행기가 뜬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 장기는 저기 땅 위에 고히 내려 놓고 껍데기인 육체만 부웅 떠오르는 느낌, 토하기 직전의 울렁거리는 딱 그 느낌이다. 제발, 무사히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게 해주세요. 곁눈질로 보니 뒷자리에 앉은 외국인 아저씨는 성호를 긋고 짧게 기도를 한다. 나는 조금 있다가 기도를 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은 등받이에 최대한 렉스하고 몸을 의자에 맡긴다. 심호흡을 하고 싶다. 심호흡을 몇 번 하면 긴장이 조금 러지는 것 같다. 바람에 흔들 흔들 이 작은 기계 덩어리와 비행크루들에게 나의 목숨을 온전히 기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비행기가 미사일 맞아서, 극심한 기상악화로 엔진에 결함이 생겨서, 조종사가 갑자기 정신이상으로 ‘우리 다 같이 죽자!’식의 범죄적 이상 행동을 보인다면? 별별 생각을 다했다. 정말 영화를 많이 본 것 같다.

  안전하게 비행기가 이륙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작게 내쉬며 남편 몰래 성호를 긋고 기도를 했다. 이런 것쯤은 겁내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남편이 어깨를 툭 친다. 방금 뭐 한 거냐며 놀릴 거리를 잡은 듯, 장난스러운 혹은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다행이다. 이렇게 아무일 없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지금 여기 한 작은 시가지 호텔방에서 글을 끄적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나는 지금 무사히 독일에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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