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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Jan 16. 2020

멕시멀리스트의 여행 짐싸기

  남편의 출장을 따라 3주간 독일에 머물기로 했다. 남편에게는 이번 출장이 매일같이 채팅으로만 대화하던 동료들을 직접 만나야 하는 조금은 성가시고 신경쓰이는 일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번 남편의 출장으로 그야말로 ‘득템’의 행운을 누리는 셈이다. 남편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원하는 만큼 마음껏 동네를 누비며 이방인의 자유를 만끽하고, 무엇이든 글로 적어볼 요량이었다. 작가에게는 늘 새로운 영감과 약간의 긴장감이 필요하다지. 낯선 곳에서 새로운 글쓰기의 루틴을 만들고, 하루에 정해진 분량만큼의 글을 쓰면, 주변 탐색을 위해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숙소에 돌아와 미리 사둔 재료들로 간단한 식사를 만들어 먹고, 또 한가롭게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이나 하면서 책보는 시늉을 하다가, 퇴근한 남편이 오면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외출을 하리라. 저녁 외출에는 최근에 산 예쁜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아무도 모르게 향수를 뿌리고, 신발도 아끼는 워커로 바꿔 신고 나가야지.

  그 동안 갖은 핑계로 읽지 않고 책장에 모셔 두었던 리딩리스트의 책을 다섯  챙겼다. 혹시나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읽을 책이 없으면 안 되지 하는 희박한 가능성을 철저하게 계산하여, 전자책과 단말기 충전기를 챙겨 넣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필사를 하고 싶어질 것 같아 두꺼운 필사노트와 볼펜도 여러 개 챙겼다. 1월의 독일은 무진장 춥다고 남편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엄살을 피워서, 얼어 죽을 않을 만큼의 두툼한 겨울옷과 일주일은 거뜬히 넘길 정도의 속옷도 챙겼다. 쓸 일이 없어 버릴까 말까 옷장 문을 열 때마다 늘 나를 고민에 빠트리는 귀마개와 유행을 한참 지난 뭉툭한 보온성 최고의 목도리도 챙겼다. 독일사람들은 패션테러리스트라고 하니까, 나 하나쯤 더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래나 저래나 나는 이방인이니까 더 망가져도 괜찮겠지. 이번 여행은 패션을 아예 포기하고 짐을 쌌다. (참, 이렇게 쓰니 평소에 내가 꽤 옷을 신경써서 잘 입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은데, 사실 일상의 나는 같은 옷을 며칠씩 입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패션에 무관심한 사람이다.) 이제 최소한 추위로 고생할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아뿔싸! 화물용 대형 캐리어 하나가 옷으로 가득 찼다. 원래 계획은 이 큰 캐리어를 비워가서 잔뜩 새로 구입한 물건들로 채워오는 것이었다. 이미 실패한 계획이 되어 버렸다.
  
  나에게는 두번째 케리어가 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남편과 나는 외국에서 제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결국은 물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오는 연어처럼, 한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독일은 사실 유럽국가들 중에서도 맛있는 것이 딱히 없는 나라이다. 남편의 직장 동료들(독일인)은 너희 나라에서 제일 맛있는게 뭐냐고 물으면 ‘카토퍼’라고 답했다. 카토퍼(kartoffel)는 감자의 독일말이다. 독일 사람들은 이 앙증맞은 작은 감자를 슬라이스 하여 버터에 볶아 사이드로 곁들여 그 유명한 독일 소시지와 함께 먹기도 하고, 영국의 피쉬 엔 칩스 처럼 칩으로 먹기도 하고, 으깨어 매쉬드포테이토로 먹기도 한다. 익숙한 조리법이라 특이할 것이 하나 없는데, 독일 사람들은 이 독일 감자에 대한 자부심이 꽤 큰 것 같아 신기히다.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서, 우리의 두번째 케리어는 식량 저장고이다. 출국 몇 일전 우리는 마트에 들러 햇반 한 박스와, 전자레인지만 있으면 훌륭한 한 끼가 되는 반 조리식품들을 두둑하게 샀다. 8시간 동안 정성스럽게 고아내어 사골의 깊고 진한 맛을 담았다는 사골곰탕과 정성스럽게 우펴낸 육수에 결대로 찢은 소고기와 부드러운 미역을 넣어 만든 소고기 미역국, 해물과 잘 어울리는 매콤한 맛 카레, 정성스레 담근 깊고 구수한 된장에 두부, 감자, 양파, 애호박을 풍성하게 넣어 끓인 된장찌개와 맛과 향이 살아 있다는 조미 김, 각종 컵밥, 참치 캔, 옥수수맛 과자와 견과류가 들어있는 오징어 맛 과자도 챙겼다. 제품에 쓰여 있는 광고글귀를 그대로 적어 보았는데, 상품을 브랜딩하는 데에는 역시 광고 카피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 것을 보니 말이다. 이 캐리어의 소중한 식량들은 출근하는 남편을 위한 정성이 듬뿍 담긴 든든한 한식 상차림으로 바뀔 것이다. 혹은 느끼하고 짠 독일 음식에 지쳐버린 우리의 미각을 다시 구수하고 얼큰한 한국식으로 바꾸어 줄 소울푸드가 될지도 모른다.

  싱글시절에 단짝친구와 나는 미니멀한 삶의 트렌드에 빠져 미니멀한 삶을 준비하기 위한 책을 구입하여 읽거나, 필요없는 물건들을 버린다는 명목으로, 그 빈 자리에 새로 산 물건들을 채워 넣었다. 진정한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살림의 개수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물건에도 주인의 가치관과 취향을 충분히 반영하여 신중하게 상품을 구입하는 것이라 여겨,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많은 물건들을 구매했다. 친구와 나는 미니멀한 삶을 지향하는 멕시멀리스트임을 지금은 안다. 우리는 어느덧 둘 다 짝을 만나 결혼을 했고, 나의 신혼집은 남편과 나의 정신과 혼을 담은 소중한 물건들로 풍성하게 넘친다. (내 친구의 집도 자세히 뜯어보면 우리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단 자신의 소비성향을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다. 절대 필요없는 물건들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멕시멀한 삶에는 사실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텔레비전앞에 놓아둘 작은 세라믹 루돌프 장식품 두 개를 세일해서 단돈 이천원에 구매한다. 충동적으로 단지 예뻐서 구매한 것이 아니다. 그 두 마리의 루돌프가 손가락 마디 하나쯤의 키차이가 났는데, 마치 남편과 나의 키차이와 수학적 비례로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작은 루돌프의 목에는 작은 리본이 하나 메어져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이건 여자 루돌프, 바로 ‘나’라는 느낌이 왔다. 지금 이 한 쌍의 루돌프는 스피커 위 한 공간에 예쁘게 자리 잡고 우리 집의 한 축이 되어 주었다.

  이제 화물용으로 부칠 케리어 두 개가 완성되었고, 기내용에 부칠 소소한 짐들을 담은 케리어도 각자 하나씩 준비했다. 3주간의 독일 체류기간동안 하나의 식량 케리어가 비워질 것이다. 또 이래저래 을 우겨 넣어 줄이고 합치면, 기내용 케리어 하나쯤은 거뜬히 빌 것이다. 나에게는 두 개의 빈 케리어가 생길 것이고, 이 말은 두 개의 케리어만큼 새로운 물건들을 더 채워 올 수 있다는 뜻이다. 상상만해도 마음이 두근두근 설렌다. 북유럽의 우울함을 없애줄 카페인 함량 높은 각종 차와 커피들, 독일산 튼튼하고 실용적인 생활용품들, 집에 걸어둘 북유럽풍 작은 그림 한 점, 한국에서도 구할 수는 있지만 비싸서 현지에서 많이 구매해 두고 싶은 뮤즐리와 빵에 발라 먹는 미친듯이 다양한 잼과 치즈들, 남편이 좋아하는 와인들이 우리의 쇼핑리스트이다. 언제든 추가할 수는 있지만 더 뺄 수는 없는, 멕시멀한 우리의 쇼핑리스트를 종이위에 차분히 적어 본다. 아, 적다보니 또 몇 가지 빠트린 것이 있다. 자전거의 나라에서 자전거 용품을 빼놓을 수 없지, 그리고 이번 기회에 튼튼한 바람막이도 아웃렛에서 한 벌 득템할 것이다. 멕시멀리스트의 짐싸기는 아마도 미니멀리스트의 그것보다는 많은 꿈과 희망으로 넘쳐날 것이다.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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