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 산다. 그래서 뭐든 혼자 하는 것이 익숙하다. 혼자서 밥 먹기, 영화 보기, 여행하기, 캠핑하기, 요리하기, 사진 찍기 등등등 뭐든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많다. 그런데 오랜 시간 혼자 지내다 보니 가끔 이 혼자의 삶이 선택이었을까? 필수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아마 성격상 그냥 그렇게 되었다가 맞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내가 원해서 혼자인 시간을 선택할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누군가와 함께 먹는 밥이 맛있고, 함께 보는 영화가 재밌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시간 혼자 지냈으니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는 게 맞을 듯싶다. 그래도 여행은 여럿보다는 혼자 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도 비율로 따지자면 5:5 정도라고 할까? 혼자만의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결정하고 변화하였기에 아직은 혼자 가는 여행이 좋다에 한 표이지만 그렇다고 둘 혹은 여럿이 가는 여행의 즐거움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차피 혼자만의 삶이 주어진 나는 온전하게 그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은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혼자인 삶을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관계라는 걸 유지하고 살아가며, 그 관계에서 소외된다는 건 혼자 먹는 밥보다 훨씬 큰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도 온전하게 1인분의 삶을 산다는 것이 타인과의 완벽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의도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드는 노력을 하기도 하는데, 이때에 필요한 것이 등가교환이다. 서로가 비슷하게 생각하는 소중한 가치가 교환되어야만 그 관계는 오래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관계이든 온전히 한쪽에서만 줄 수도 또 받을 수만은 없으며 이 관계는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자신과의 관계를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를 사랑하라'라는 말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라.
사람은 누구나 관심을 바라고 누군가 사랑을 가지고 돌봐주기를 원한다. 그것은 단지 받기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하기도 한다. 그런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였거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타인에게 베푸는 것에 쉽게 지쳐버린다. 왜냐하면 모든 관계에는 등가교환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내가 무언가를 베풀었다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채워져야 관계를 지속하고픈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동등한 가치의 소중한 무언가를 동등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나눌 수 있는 관계라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이유이다. 나 스스로가 원하는 것과 바라는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할 수 있는 것,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마도 받는 것이 없어도 맹목적인 애정을 주는 존재는 부모 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그조차도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기니 여기에도 등가교환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한 절대적인 관계를 제외하고 우리가 가지는 인간관계에서의 소중한 가치란 그 기준이 모호한 만큼 때로는 잘 맞으면 오래 지속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쉽게 지치거나 상처로 끝나기도 한다. 그래서 관심과 애정에도 연습과 단련이 필요하다. 서로의 시각을 이해하고 수긍하는 연습과 자칫 틀어지더라도 상대를 이해하고 상처받지 않을 단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연습과 단련은 자기 자신을 애정을 가지고 돌보는 일에서 시작한다. 스스로를 어린아이처럼 입히고, 먹이고 살피는 것은 단순히 온전한 1인분의 삶을 넘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한 연습이기도 하다. 그렇게 각각의 1인분을 온전하게 살아내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2인분 3인분의 관계에서 존중받고 존중하는,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동등하게 교환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내가 지방살이를 선택한 후, 처음 얼마 동안은 그렇게 단절된 혼자만의 시간이 좋았다. 어차피 서울에서도 혼삶이었고 최소한의 관계들마저 의도한 단절이었으니 모든 이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 나는 편했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복병이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 '격리'라는 환경을 제공하였고, 서서히 혼자 놀기에 지쳐가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주변의 복잡한 환경 속에서 의도적으로 혼자 여행을 하고 혼자 사진을 찍고 혼자 놀기에 익숙했다. 그렇게 지내는 시간은 나름의 신선한 변화를 주는 것이라 떠나면 편안하고 돌아오면 불안했을망정 삶이 정체되었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자의 반 타의 반 격리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코로나 시절의 내 삶은 혼자서 하는 모든 것들이 신선하지가 않았다. 굳이 떠나지 않아도 나는 혼자였으며 여행자라 믿었던 콘셉트는 외톨이가 되어간다는 느낌이었다.
서서히 나는 사람을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떠나온 그곳이 그립거나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여전히 여행자로 살며 지치지 않을 정도의 일을 하면서 짬짬이 여행을 다니고, 그림을 그리고, 독서를 하고, 때때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술 한 잔 곁들여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평생 먹고 남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 최소한의 벌이는 해야 하고 그나마 있던 친구들은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졌다는 이유로 관계가 소원해져 버렸다. 여행하는 마음으로 언제든 오라고는 하였으나 나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그들더러 만 오라고 하는 건 그야말로 등가 교환이 안되는 일이었던 거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시간과 경비를 투자해서 자주 찾을 만큼의 가치는 못된다가 뼈 때리는 현실이기도 했다. 여행자로 산다는 나의 콘셉트는 변함이 없으나 자의 반 타의 반 이곳에서의 삶이 조금 더 긴 현재 진행형이 된 이상 나에게도 커뮤니티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건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살아온 날들이 사람을 변화시켰는지는 모르지만 오래된 관계들도 삐걱거리는 게 나이 듦의 수순인데 하물며 나를 모르는 사람들만 가득한 타지에서 외지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그래도 나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산다. 고향이니 삶의 터전이니 하는 것을 떠나 한곳에서 뿌리내리고 살 생각이 없으니 나는 현재에도 떠나 있는 삶이다. 떠나면 편안했지만 돌아오면 불안한 것이 싫어서 그 돌아올 장소를 스스로 없애버렸다. 그래도 이곳에서 3년째 살고 있으니 여기에 '내 집'이 있는 건 맞다. 그러나 이곳이 내가 돌아올 곳은 아니다. 언제라도 환경이 허락하면 떠나도 좋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만들어지고 또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지금 내 1인분의 삶이 온전해지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온전한 1인분의 삶이란 혼자라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색깔을 가지고 모여있을 때 더 온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제 혼삶이 단지 혼자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수많은 컬러들 중에서 나만의 색깔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그 색깔이 마음에 드는 다른 색들과 잠시 섞이기도 하고 그저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 상태를 인정할 수 있는 것. 때로는 외롭다 느끼기도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자유를 감사할 줄 아는 것. 나이 든 여자의 혼삶이란 '관망'이라는 미덕을 배우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람은 누구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 있고 또 그것을 소유하고 난 후에는 곧 싫증을 낸다. 나는 그것 또한 '관망'하기로 하였다. 마음은 늘 오고 가고, 왔다가 떠난다. 내 마음조차 그런데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오고 가는 관계들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나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나의 온전한 1인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 믿고 싶다.
나는 오늘 '마음이 통하면 누구나 친구'라는 마음으로 새로운 친구를 만나러 간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그녀는 어쩐지 나와 결이 비슷할 거란 느낌이었다. 예전의 나라면 상상 못 할, 낯선 사람과의 대화나 새로운 관계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은 온전한 1인분의 삶을 조금은 다채롭게 만들어줄 거란 기대도 더불어 준다. 관계 맺음이 어려운 이유는 사람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등가교환이라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거라 내 기준으로 그 가치를 결정해 버리면 관계는 어렵게 흘러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관계가 주는 다채로움을 배우려고 한다. 나 스스로 온전한 1인분의 삶으로, 그리고 그 모든 관계들 또한 각각의 온전한 1인분의 삶으로 인정하고 '관망'할 수 있는 시각을 배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