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뒤끝 있는 A형이야!!
상처를 허락하라
나는 가끔 스스로를 '뒤끝 있는 소심 A형'이라고 말하곤 한다. 상처받았으나 표현하지 못할 때 애써 돌려 말하는 것이다. 차마 "나한테 상처 주지 마"라는 말을 못 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상처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혼자 살든 아니든 인간관계라는 걸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마음일 수는 없기 때문에 타인에게서 보이는 나와 다른 생각이나 행동들은 모두 불편한 것이고 그것의 정도가 심하면 상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받은 사람은 많다는 것이 상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자의든 타의든 혼자 사는 사람들은 상처를 더 잘 받는다고 말을 한다. 혼자서 풀고 혼자서 삭히고 또 혼자서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일까? 만약 내가 타인에게서 느껴지는 모든 불편함을 상처라고 느낀다면,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은데 자신만 유독 힘들다고 느껴진다면, 한 번쯤은 내가 왜 상처에 취약한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삶이라는 시간 안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스토리로 인생을 채워나간다. 혼자 산다는 것은 혼자 자고 혼자 일어나는 것일 뿐, 어쩔 수 없는 관계 맺음을 허락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상처들 또한 허락하는 것이 각각의 1인분을 삶을 주어진 대로 잘 사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처를 허락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신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취약점을 알며 스스로에게 "그럴 수 있다" 얘기할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타인에게는 '뒤끝 있는 소심 A형'도 "넌 그렇구나"라고 봐주면서 왜 스스로에게는 내 성격이 '뒤끝 있는 소심 A형'이라서 상처를 잘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뒤끝 있는 소심 A형'이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도 아니요 성격파탄자인 것도 아닌데 왜 유독 스스로에게는 부정적이 되어 안 받아도 될 상처를 받았다고 징징거리는가 말이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상처를 허락하기까지는 자신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뒤끝 있는 소심한 A형'의 형성 과정을 생각해 보고, 인정함으로써 더 이상 상처가 아프다 말하지 않고 상처를 허락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향형의 성격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 스스로를 모를 때가 많다. 일례로 나는 내가 '내향형'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인정하게 되었다. 사람의 성격은 너무 다양하기에 꼭 '외향형'이 낫다거나 '내향형'이 낫다거나 하는 정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내향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나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상처들에 대한 이해와 답을 얻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심리 상담을 하듯 내 안의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나는 적어도 대중 앞에서 낯을 가리거나 말을 못 하거나 낯 선 사람과 대화가 힘든 유형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을 잘하는'사람이라고 믿었고 또 그런 얘기도 자주 들었다. 그래서 강의를 하거나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는 내가 적성에 맞는다고 믿었고 친구가 없다거나 인간관계가 나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뒤를 돌아보니 낯 선 사람과 말을 잘한다고,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고 경계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늘 나는 주변을 의식했으며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는 경우에 극도로 민감했다. 내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나 환경이 늘 거슬렸기에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계산하지 못했던 당황스러운 상황들은 상당수 상처로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지 내가 대중 앞에서 잘 웃고 스스럼없이 지냈던 건 본연의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단지 대중 앞에 서야만 하는 나의 환경이나 직업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화려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던 상황에서 벗어나면 혼자서 하는 모든 것들이 마음 편했고 집순이가 제일 나다웠던 것 같다. 아마도 상처받지 않으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믿었던 '가장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던 시간들'은 어느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더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을 힐링이라 믿었고 결국은 모든 관계를 내려놓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보니 생각보다 끊을 관계가 많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표면적으로야 어떻든 나는 늘 혼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는 것이 익숙하고 상처받는 것을 두려운 내향형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외향형의 성격이라고 상처받는 것이 두렵지 않을까마는 적어도 내가 내향형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면서 나의 지난날들이 조금 더 이해가 되었다.
회피 성향
결국 나의 내면은 낯을 가리고 경계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어쩌다 내가 마음을 여는 관계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였으며 무언가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 회피하고픈 욕구가 많았으며 거기에서 받는 상처가 어마어마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회피 성향의 내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헤쳐나가는 사람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했으니 아마도 그 스트레스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도 운신의 폭이 좁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성향이 강했다.
아마도 동성이든 이성이든 그런 나와 집중해서 교감하고 공감하는 건 참 버거운 일이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스로 회피 성향의 사람이라고 말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동의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결단을 내리는 시간이 빠르고 또 추진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누가 대신해 줄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 나를 더 그렇게 보이게끔 한 것이 아닐까? 그런 나의 결단력은 하나하나 구체적인 문제나 사건일 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결국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까지도 단숨에 해치워버림으로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아예 싹 바꿔버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상처받은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력이 좋다는 건
나의 내향적 성향 그리고 회피 성향 외에도 상처를 쉽게 받는 나의 취약점은 기억력에 있다. 머리가 좋아서 기억을 잘한다기보다는 느슨하고 다양한 인간관계보다는 좁고 깊은 인간관계 형성이 더 바람직하다고 믿었던 탓에 한 가지 상황이나 사람에 집중하는 성향이 있어서 소위 말하는 '뒤끝 있는' 성격을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내가 말하는 뒤끝이란 쉽게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매사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것이 상처라 할지라도 자신이 받은 것도 준 것도 잘 기억 못 한다. 그런데 같은 상항에서 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이 또렷해지는 사람이다. 준 것도 받은 것도 참 잘 기억한다. 왜냐하면 난 누구에게든 진정성이 있으려면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며 중요한 사람이나 일을 기억 못 한다는 건 치매이거나 그냥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주변의 모든 사람과 상황들은 내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늘 '따지는'사람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슨 대화를 했는지 조목조목 기억하는 내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반응을 늘 "너무 따진다" 또는 "뒤끝 있구나?"였다. 난 그저 설명하는 것인데 그게 왜 따지는 것이 될까? 좋은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길은 상대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내 기억력으로 설명해 봐야 기억이 안 나는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기억력이 좋은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상처를 쉽게 받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기억하지 못하므로 상처받을 게 없다. 단지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느슨하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폭이 좁고 깊은 관계는 집중과 기억력을 배가 시킨다. 하지만 스스로 느슨하고 다양한 관계는 스스로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모든 것을 기억하고 담아두지 못할 것이다.
눈물이 많은 사람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감성적인 사람이다. 아니 지금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눈물은 꼭 감정이 움직여야만 나오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냥 나오는 것이다. 그냥 선천적으로 눈물이 많은 사람인 거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를 이상하게 보기도 한다. 왜 그렇게 눈물이 흔할까? 생각해 보니 눈물이 흔한 건 단점이다. 돌직구인 내 친구 중 한 명은 내게 왜 그렇게 질질 짜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 말이 엄청 아팠다. 그래도 마음을 나누는 친구하고 믿었는데 질질 짠다는 표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대답한다. "질질 짜니까 질질 짠다고 하지" 흔한 눈물은 참 값어치가 떨어지는구나를 그때 알았다. 그것이 공감이든 슬픔이든 감정의 표현이든 소용없는 거다. 흔한 건 그저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상처는 그렇게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뜻하지 않게 다가온다. 하지만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인 걸 어떻게 하겠나?
나는 '뒤끝 있는 소심한 A형'이다. 앞으로도 크게 변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상처를 받는 주체가 나인데 내가 그것을 허락한다면 무슨 문제겠는가? 우리는 살면서 때로는 내 생각과 다르고 내가 이해 못 할 행동이나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럴 때 사람은 다 다른 거니까 "네 성격에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말하며 그냥 넘기기도 한다. 그런데 스스로에게는 "그럴 수 있다" 말하는데 참 인색하다. 어쩌면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 하듯 "그럴 수 있다"라고 얘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상처라는 걸 덜 받게 될지도 모르며 나의 상처를 타인의 공감과 위로로 애써 풀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나는 상처받았다. 내 성격이 그러하니 쉽게 상처받는 게 이해된다. 그 상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저 왜 나에게 저런 상처를 주나 고민하는 대신 타인에게 말해주듯 "너 그럴 수 있어" 또는 "그렇게 말하는데 상처 안 받는 게 이상한 거야"라고 얘기해 주자. 때로는 진짜 받은 상처보다 상처받는 나를 더 못 견딜 때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상처들은 스스로가 준 것들은 아니었을까? 그저 내가 나를 잘 몰라서 진짜 받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