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태국에 잠시 들렀다. 호주에서 만난 친구의 가족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학생 신분일 땐 누구나 검소하게 살았지만, 친구네 집은 달랐다. 으리으리한 저택, 늘 웃음소리가 넘치던 외향적인 가족들. 능숙하지 않은 영어로도 나를 방콕 구석구석 데려다 준 어머니의 환대가 황송했다.
“언젠가 한국에 누군가 오면, 나도 이렇게 대접해야지.”
그때 다짐했던 그 마음은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나는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언젠가 또 찾아올 기회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해는 ‘대한민국 취업빙하기’라 불릴 만큼 경기 상황이 나빴다. 친구들이 하나둘 취업 소식을 전해올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운 좋게도 나는 작은 광고회사에 회장 비서로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엔 월급이 매달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복수전공, 수많은 팀플, 알바로 쫓기던 대학 시절과 달리, 퇴근 후엔 쉴 수 있었다. 그 여유가 달콤해, 잠시 삶의 방향을 잊고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책상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마주했다.
“나는 지금 발전하고 있는 걸까?”
회의실 비품을 준비하고, 회장님의 일정을 관리하는 일만으로는 내 안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새벽 영어 학원에 등록했지만, 허전함은 그대로였다.
결국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대학원에 갈 것인가, 회사를 옮길 것인가. 나는 둘 다 지원했다. 하나는 영어로만 수업하는 국제대학원, 또 하나는 미국 합작 제조업체의 해외영업팀이었다.
면접장에서 깨달았다. 다른 지원자들의 이력서와는 달리, 내 이력서에는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워킹홀리데이.
그저 어학연수가 아닌, 스스로 일자리를 찾고, 번 돈으로 공부하며, 낯선 환경 속에서 살아낸 1년.
나는 그 이야기를 정리해 영어로 스크립트를 만들고, 백 번도 넘게 소리 내어 연습했다. 그룹 면접 날, 나보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지원자가 있었지만, 나는 또박또박 준비한 이야기를 전했다. 면접관들은 내 말에 귀 기울였다. 단순히 유창함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정성과 생생한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결국 나는 그 경쟁자를 제치고 합격했다. 국제대학원에서도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나는 공부보다 일을 택했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내 대학 시절의 특이한 이력이, 나만의 자산이자 무기가 되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