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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lina May 07. 2018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살아가기

『공부의 철학』이 나에게 준 자유

문학시간 객관식 문제. "해당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따위의 문항의 4지선다 보기에서 자주 봤던 ‘전지적 작가 시점’. 갑자기 왠 문학작품 서사 방식 이야기냐고? 최근 읽은 『공부의 철학』이란 책을 읽고 든 결론이 “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살아야겠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좀처럼 완독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쉽게 질려하는 나의 책 입맛에도 완독, 그것도 꽤나 샅샅히 느리게 꼭꼭 씹어먹듯 읽은 이 책. 이 책을 기반으로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1.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일단은 (고리타분하지만) 전지적 작가 시점이 대체 무엇인지 그 정의부터 살펴보자.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렇듯, 전지적 작가 시점은 모든 등장인물들과 사건을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듯 하며 극을 전개 해 나간다. 이러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살아가자고?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당연히 불가하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만 안다. 1인칭 작가 시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살아가자는 건 사실 말장난이다. 실제로 그렇게 될 수는 없는데, 그런 척은 하며 살자는 거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닌 다음에야 전지적 존재가 실제로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2. 왜 그렇게 살아가야 하나?


그렇다면 이제 전지적작가 시점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정확히 말하면, 내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살기 원하는)에 대해 이야기 할 차례다. 나름 정리 해 보니 3가지 이유가 나왔다.


1) 나를 객관화하기 위해

2) 상처받지 않기 위해 

3) 시야가 거창해지니까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자. 1) 나를 객관화 한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더 와닿게 이야기하면, 유체이탈한 것처럼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이다. 유령이 되어서 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고 생각 해 보자. 문득 이질감이 느껴질 것이다. 거울을 가만히 보는데, 갑자기 내 얼굴이 낯설고 괜히 딴 사람같은 그 느낌.


그렇다면, 나를 객관화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파괴다. 

객관화하는 순간부터 자기파괴에 이르는 프로세스를 정리 해 보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스스로에 대한 이질감(흠칫 놀란 감정적 순간) → 관찰(물끄러미 본인을 바라보는 이성적 순간) → 불편함(스스로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보여 불편한 감정적 순간) → 자기파괴(나를 바꾸는 이성적 순간)


이 프로세스 과정은 1년이 걸릴 수도, 10초가 걸릴 수도 있다(30년 넘게 가져온 나쁜 습관을 장기간 노력을 통해 고칠 수도 있고, 30년 넘게 가진 편견을 순간의 계기를 통해 깨뜨려버릴 수도 있다). 


기간이야 어찌됐든, 감정적 순간과 이성적 순간이 교차하면서 스스로와 끊임없는 대화를 하게 된다. 그 결과 자기 파괴(변화)를 한다. 이것이 나를 객관화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다.



공부의 철학에서는 ‘메타적 입장’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쉽게 풀어 써 보았다.


코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비유하자면 나 홀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 것’이다. 이때는 ‘이래야 한다(당위)’를 ‘이러한 코드다’라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본다. 환경에 관련짓지 않는다. 이것을 ‘메타적 입장에 머문다’라고 말하자. ‘메타’란 ‘고차원적’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문맥에서는 환경에서 겉도는 입장이 되어 의기양양하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전체를 조감하는 위치를 뜻한다. 
『공부의 철학』p.81~82




다음 이유. 2)상처 받지 않기 위해

사실 조금 나약해 보여서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쩌겠나? 모든 사람은 상처를 받는 게 사실인 걸.


메커니즘은 똑같다. 처음엔 나를 객관화하여 이질감을 느끼고 파괴(변화)했다면, 이번엔 그 잣대를 나를 제외한 모든 세계(이 책에서는 ‘타자’라는 개념을 썼다)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살쾡이마냥 여기저기 상처를 긁어대는 사람이 앞에 앉아 있다. 

-1인칭 시점의 나는 너무 아프다. 저 사람이 밉고 원망스럽다. 왜 저렇게 된건지 무슨 사정인 건지 궁금하고 화가 난다. 

-전지적 시점의 나는 아파하는 나를 본다. 저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나를 본다. 공격하는 저 사람의 의도는 알 수가 없지만, 인간 모두가 가진 속세적인 수만가지 감정 中 하나겠거니 생각한다.


전지적 시점이 된다는 것은 신이 된다는 개념이 아니다. 상대의 심리를 정말 정확히 ‘알게 되어서' 가지는 안정이 아니다. 그냥 나의 시점을 달리했다고(유체이탈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괜히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사실, 나는 유체이탈을 했기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가 없지”)


결론적으로, 전지적 시점을 타자에 적용하면 여유가 생긴다. 노여움과 원망을 할 시간에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쿨하다. 루저 느낌도 안나고 좋아 보인다. 이렇게 안 하고 싶은 사람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3)시야가 거창해지고 싶기 때문에 나는 전지적 시점으로 살아가고 싶다. 시야가 넓어지는 것도 아니고 ‘거창해진다’는 건 뭘까? 


거창한 시야를 가진다고 해서, 1) 그닥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니고 2) 당장 눈 앞의 좋은 결과를 만드는 수단도 안되고 3) 이거 가진다고 멋있는 사람 소리 들을 만한 일도 아닐 수 있다.


현명한 공자의 느낌보다는, 눈이 반짝이는 몽상가의 느낌이다. 그래서 시야가 넓다기 보다 거창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나는 시야가 넓은 현인이 아니라 사유하는 몽상가가 되고 싶다.



시야가 거창 해 진다는 것은, 말은 안되는데 엉뚱하게 생각이 나서 괜히 연결지어 보는 것이다. 북한과 남한의 대표가 만나 손을 잡고 걸어가는데, 문득 돌고래와 인간이 교감하는 장면을 봤을 때의 좋은 기운이 떠오른다. 


'씻기가 귀찮다'는 찰나의 생각에서 시작해서, 씻지 않아도 괜찮을 방법을 생각하고, 항균옷을 머릿 속에 그리다, 문득 그런 옷이 있다면 씻고 싶어도 못 씻는 빈민국의 아이들에게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만들어 낸다면 위생 인프라가 빈약한 국가에 비약적 기여를 할 수 있을 지 모를 일이다.


이런 소리를 했을 때 “와 시야가 넓구나”라는 소리를 듣기는 힘들 것이다. 아마  “헛소리 그만하고 그냥 씻는게 어떨까” 혹은 “그래서, 기술은 있고?” 정도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그래도 나는 거창한 시야를 가지고 싶다. 적어도 상상력은 풍부해지니까. 그러다 정말 얻어걸릴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가령 ‘애초에 왜 일해야만 하는 것인가?’와 같은, 해봤자 소용없어 보이는 의문을 일단 말해본다. 나아가 ‘인류가 더는 일하지 않게 된 세상’이라는 말의 나열조차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언어유희로서. 그것이 사회와 경제의 구조를 깊게 생각하는 열쇠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혹은 졸업하여 구직 활동하는 것과는 다른 식의 일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공부의 철학』p75~76




3.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전지적 시점으로 산다는 게 말이 쉽지, 그럼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인가? 이중잣대를 갖는 것이다. 공부의 철학에서는 이중잣대의 성격을 가장 잘 내포하고 있는 것이 ‘언어’라고 보았다. 언어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어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 안에 갇혀있지만, 때로 언어유희를 통해 세계 밖으로 탈출하기도 한다(소금은 달다. 유창한 벙어리. 같은 식)


작중인물이 아닌 ‘이야기 밖의 서술자’에 의해 극이 서술된다는 것이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개념의 포인트다. 하지만 이것이 개념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전지적 시점인 척 나를 포함한 모든 세계를 관망하듯 바라본다 할지라도 잠시일 뿐, 우리는 다시 1인칭인 ‘나’로써 ‘실제 세계에서’ 말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이러한 한계를 쿨하게 인정해야 한다. 


뭐 그렇다 할 지라도, 마실 다녀 온 개구리는 우물 안 개구리보다 더 멋있지 않던가.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여행이 우리에게 꽤나 세계관을 넓혀준다는 것을. 별 생각없이 보던 찻길 꽃 화단도 그냥 보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조경이 너무나 멋있었던 그 ‘프랑스’에 무작정 이민을 가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꽃을 본다는 것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 꽃을 보는 우리가 달라졌을 뿐이다.


전지적 시점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원래의 나'와 '유체이탈 여행을 하고 온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 있다. 그것이 변화한 나다. 



즉 ‘바깥으로 나가려는’ 의식은 가지되 궁극의 바깥(현실 그 자체)은 지향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언어는 환경을 벗어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언어의 환경 의존성’을 인정한다. (중략) 첫 단계의 어떤 환경에 묶여 있는 보수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한 바퀴 돌아온’ 후 원래의 환경 의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공부의 철학』p.98~99



이왕이면 우물 안 개구리 말고 여행가는 개구리가 되기




4.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나?


나에 대한 객관화, 상처받지 않기, 거창한 시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능성 외에도 전지적 시점으로 살아서 좋은 점들은 각자 개성에 따라 여러가지 파생될 것이다. 사실 이런 것들은 표면적인 이유다. 


궁극적인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다. 왜 내가 ‘심정적으로’ 전지적 시점으로 살아나가고 싶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공부의 철학이라는 책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지식을 축적 해 나가고 숨쉴 틈 없이 경쟁하고, 그러다 나가떨어지면 패배자이고. 진짜 공부란 무한한 축적이 아니라, 유한한 축적 + 나의 변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라는 말은 나를 위로했다. 


위로 해 주려고 작정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더 부담스러운 반면, 따뜻한 우유 한잔 던져주고 가는 무심함이 더 찡하고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일단은 이 정도까지 공부했다’라고 얘기하기 위해 전지적 시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살면 내가 가진 헛된 완벽주의결단주의도 탈피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나 스스로에게 자유를 선물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말마따나, 공부하는 독종에서 사유하는 별종으로 유쾌한 변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를 읽어나가는 체험을 하게 된 시간이었다. 공부의 철학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라고 불려도 좋을, 책 한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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