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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lina Apr 22. 2018

지금과 다른 나를 꿈꾼다면

언어가 나다, 내가 언어다

『공부의 철학』을 통한 나의 고백 1 - "그래, 그게 공부의 본질이야"


나는 느긋한 편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겉보기에 여유있어 보일 때도 있지만, 내 자아의 본질에는 항상 '긴장'이라는 상태가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긴장이란 '주어진 현실과 감지된 가능성 사이의 구체적 간극을 인식하는 것'이다. (긴장을 '문제'와 동일시하면 안된다. 문제는 고쳐야만 하는 부정적 대상이지만, 긴장은 남들이 보기에 아무렇지 않은 것도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긴장은 때로 해결해야 될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중립적 개념이다. 이러한 긴장에 대한 정의는 『홀라크라시』라는 책(Brian J. Robertson 저)에 나오는 개념을 그대로 차용했다.)


긴장을 항시 가지고 사는 사람은 스스로를 가만히 두질 않는다. 호기심도 꽤 많다. 그러다보니 취미든 공부든 이것저것 하고 싶다. 그러나 당연히 현실적인 벽(절대적 시간의 부족, burn-out 하고 마는 에너지의 제약)에 막혀 좌절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종종 나오는 결론은


 "하나만 집중해서 공부하자"였다.


여기서 공부에 대한 나의 정의는, 어떤 기술이든 지식이든 본래의 나에 플러스 알파(+α)하여 뭔가를 축적하는 개념이다. 내가 바라보는 공부의 개념이란 항상 그랬다. 그런데 공부의 철학이란 책이 나에게 다른 답을 내놨다.


 공부란 축적이 아닌 (자기)파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이 책은 마치 나를 도끼로 꽝하고 꿰뚫는 듯 혹은 위로하는 듯 했고, 머릿 속에 있던  스스로에 대한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 쓰는 글은 리뷰라기 보다 차라리 나에 대한 고백에 가깝다. 약 3편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굳이 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까지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이야기한 이유는, 이 책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현 상태에 만족하고 본질적인 답답함 내지 탈출욕구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이들에게는 필요없는 책이다.


본질적인 탈출 욕구는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이다. 나와 관계된 모든 동조(이 책에서 사용한 개념적 단어)로부터. 동조는 무형적(내가 가진 생각, 무의식적으로 세뇌된 문화 등)개념일 수도, 유형적(직장,사는 곳 등)일 수도 있다.


생각 해 보면, 책을 통한 학습을 하든 평소 살아갈 때든 "아-!" 하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기억에 크게 남는다. 단순히 탑 쌓듯 있는 지식에 한 층 더 쌓는 축적형 학습을 할 때 보다. 왜일까? "아-!"하는 그 때가 바로 우리가 가진 "동조"가 깨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고로 본질적인 공부 = 자기 파괴라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 순수한 나를 제외한 모든 동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 해 보면 완전한 자유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뻔한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혼자 무인도에서 산다고 해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철학적 의미에서 불가능하다.


자유를 위해 무인도에 가는 순간 그곳의 날씨, 식량, 우연히 만날지도 모르는 동료 등 또 다른 환경에 둘러쌓이는 것이지 환경이란 개념 자체에서 탈출한 것이 아니다. 즉, 환경의 종류 변경이지 환경 탈출이 아니다. (현재의 회사가 괴로워 이직 후 다른 회사로 간다거나 아예 퇴직 후 프리랜서로 전향을 한다고 해도, '돈을 벌어야만 하는' 절대적 환경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중도적 방향으로, 어떤 환경에 속해 있되 거리를 두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완전한 자유는 없으므로 속박당하는 와중에도 벗어날 길을 생각해야 한다.


차원에서 조금 벗어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우리는 사실 '속해있되 거리를 두고 싶다'는 아이러니한 욕구를 쉽게 접할 수 있다. "혼자 있는 게 좋은데, 혼자 있는 거 싫어" 라는 모순적인 말에 꽤 많은 이들이 공감을 한다. 또한 사회적으로 혼밥·혼술등 혼자 문화가 늘면서도, 동시에 만남의 방식과 종류가 다양해지고 고도화되고 있다.

   

연애를 위한 소개팅 어플부터(GLAM), 책이나(트레바리) 운동을 통한 모임(버핏서울)등 그 소재와 유형이 다양 해 지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결국 공부의 본질은 a에서 b로 갈 때의 낯설음 및 깨달음을 통해 결과적으로 얻는 나 자신의 변화(파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유연성을 갖추려면(다시 말해 지금과 다른 나를 원한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이 책에서는 언어편향적 인간이 되라고 말한다. 환경에 묶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독립적인, 모순적 성질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나 저기 있는 소금 좀 갖다 줄래?"
- 소금의 사회적 의미(도구적/동조에 충실)

"소금은 구름의 옛 연인"
- 언어유희적 의미(자기목적적/동조에서 탈출)


두번째같은 말장난을 보다 보면 갑자기 왜 소금이 "소금"인지, 언제부터 누가 소금이라고 한건지 의문이 생기면서 문득 소금이란 단어가 낯설어질 수 있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내 암묵적 약속에 따라 소금 좀 달라는 도구적(동조순응적)의미로 "소-금"을 말한다.


이렇듯 언어는 환경에 철저히 종속되어있으면서도 언제든 탈출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언어의 특질을 가지면 곧 공부하는 인간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언어유희 등을 일부러 쓰고 연습하면 실제로 그런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고 이 책은 이야기 한다.


내가(혹은 내 생각이) 소금이 될 수 있다면 ok다. 당연한 환경에서 살았다가도, 낯선 환경에서 유연하게 바뀔 수 있는 상태. 즉, 언어가 나고, 내가 언어가 되는 것이다. 이를 책에서는 언어편향적 인간이라 지칭했다.






공부의 본질을 언어를 활용하여 이야기하다니. 신박하고 놀라웠다. 이는 없는 개념이 신세계마냥 갑자기 등장한데 기인한 것이 아니라, 우주에 떠다니는 퍼즐을 주워 "이건 이렇게 조합하는 거였단다"라고 말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그렇다. "그러고보니 그렇네-!"라는 반응을 하게 되어서 그렇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래 3가지 지점에서 위안을 받았다.


1. 내가 본질적 공부를 할 자격있는 자아의 성격을 가진 게 맞나 (집중이 아닌 탈출 욕구가 강한데..딴 생각은 접고 한 곳을 파야하는 게 아닐까?)

2. 모순적인 욕구들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혼자가 좋은데 싫어..열심히는 살지만 개미가 아닌 베짱이가 되고파)

3. 공부의 본질적 의미-축적이 아닌 파괴-에 대한 오해 (많이 배우고 축적하여 나의 지적 크기(π)가 커지는 것이 공부지~)


이 책은 기본적으로 철학책이다. 낯선 용어 정의도 많아서, 전체적인 책의 맥락(context)을 100% 전달하긴 어렵다. 때문에 직접 책을 읽지 않은 분들에게는 "몬소리여?"라는 반응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데다가, 다분히 개인적 측면으로 글을 썼다.


그래서 서두에서 말했듯, 이 글은 리뷰라기보다 개인적 차원의 자기고백에 가깝다. 고로, 별로 안땡기는 분들은 이 책과 관련한 글들은 읽지 않으시는게 좋다. 다음편은 실전! 언어적 인간되는 비법 (부제:나는 왜 자꾸 엉뚱한 생각이 날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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