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쓰기] 3. 비

by 엄마다람쥐

눈을 뜨기 전에 빗소리가 참 좋다. 밖에 나갈 일이 복잡해지고 온통 축축해지는 날일테지만 어쩐지 오늘 빗소리는 좋다. 미국에선 이정도 비가 내리면 YMCA 프로그램이 취소 되었었다. 오가는 길 위험하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선 학원이 취소되는 일은 없다. 어찌됐건 가고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학원 노란차들은 열심히 달린다. 남쪽 캘리포니아라 비를 매우 낯설어한다. 아니 낯설다기보다 반가워하기도 하면서 비가 오면 나가지 않는 날로 정하는 것 같다. 하기사 봄여름가을겨울 해가 쨍한 날이 80이면 구름 낀 날이 15, 비는 5정도 될테니 비오는 날은 안 나가는 날, 쉬는 날로 해도 유난 떠는 건 아니다.


특히 집에서 10분 거리에서 온 세계 뉴스에 등장한 대대적인 산불이 난 뒤로 비는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나무며 집이며 다 재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비가 오면 산사태가 나기 때문이다. 머드 슬라이드(mud slide) 경고가 자주 떴었다. 처음에 머드 축제가 자꾸 떠올랐고, 애들하고 산에서 이마트 가방 깔고 타던 눈썰매가 생각나서, 이 동네 사람들도 그런 축제와 놀이를 하나 보다 했다. 캘리포니아 사람들 어찌보면 많이 엉뚱한 걸 하면서도 재밌다고 하는 경우가 많아서 난 그저 미국 사람들이 진흙타고 내려오는 상상만 했다. 불난 산에서 미끄럼을 탈 생각을 하다니 유난이네 유난이야. 제대로 오해했었다.


비하면 내 핸드폰을 잡아잡수실뻔한 워싱턴의 소나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애들은 스미소니언 우주박물관을 갔다가 그냥 호텔로 가자고 했었다. 호텔 수영장에서 놀고 싶다고 했는데, 전날도 비가 오면 안전 때문에 수영장을 30분 쉬고 날씨 보고, 또 30분 쉬고 날씨 확인하고를 반복하다 결국 문을 열지 않았었다. 아 비 좀 맞고 하면 되지 안전을 너무 따진다 싶었다. 아무튼 애들이 이도 저도 아니게 시간을 보내고 결국 뾰루퉁해지는 것을 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다 근처로 해산물을 구경가서 먹고 오자 했다. 애들은 싫다고 했다. 나와 남편은 가보자고 했다. 근처에 마트도 없고 식당도 없고 호텔 식당은 비쌌고 굳이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면 배달비를 왕창 내고 100달러 가까이 주문을 해야하니 차라리 어디 가서 구경하고 먹고 오는게 나았다. 정말 끼니 챙기는 것 때문에 머리가 아픈 워싱턴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지 말았어야 했다.


새우, 게, 생선 등을 사서 쪄주는 곳에 맡겨도 되고 이미 찐 걸 파는 곳도 있었다. 크지는 않았고 양쪽으로 가게 서너개씩쯤 있었는데 인기가 많은 곳들에 사람이 모여있었다. 쪄주는 곳에서 줄이 길었다. 점점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거세졌다. 우리도 골라서 찌는 곳에 맡기려고 했는데,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얼른 이미 요리된 것을 파는 곳으로 가서 새우와 게를 주문했다. 비 한 방울. 카드 결제를 했다. 비 열 방울. 데워줄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비 백 방울. 천 방울, 만 방울.


순식간이었다. 재난 영화처럼 바닥에 있던 통과 쓰레기가 하늘로 날아올랐고, 캄캄했다. 빗줄기는 굵어졌고, 데워준다고 하던 새우파는 사람도 "홀리 몰리" 하며 놀랬다. 홀리 몰리에 웃음 터질 일이 아니라 얼른 비를 피했어야 했는데 겁에 질린 둘째 웃겨주려고 홀리 몰리를 반복하고 서 있었다. 애만 챙기면 됐지 하면서. 도저히 서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드디어 지붕이 가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내 휴대폰이 뒷주머니에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진짜 홀리 몰리 어쩌지.


잘 켜져 있었고 지도도 잘 찾아주었다.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 뉴욕으로 가는 앰트랙 기차표를 캡처해서 남편한테 보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느낌은 현실이 되었고 다음 날부터 사과만 깜빡이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유난스럽게 새우와 게를 먹겠다고 기어이 애들을 끌고 간 것도 홀리 몰리고 100달러보다 좀 아껴서 먹자고 데려가서 핸드폰을 해잡수실 줄은 몰랐다. 1000 달러 천불나는 천달러짜리 새 기계는 영 어색했고, 남 일 이야기 하듯이 이건 오래 된거니 새로 사세요, 애사심이라곤 일도 없는 애플 수리 직원 때문에 유난스럽게 기분이 나빴고, 예전 기계가 연결이 안될 경우, 애플 아이디 비번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애플 직원들의 대답에 마치 돌려깎기 당하는 사과가 된 것 같았다. 뭐든 "방법을 찾아봅시다."하던 캘리포니아 사람들과는 너무 달랐고, 사설 업체에 맡기라고 하는 뉴욕 애플 수리 기사는 피드백 해달라고 이메일이 왔을 때 내 모든 마음을 담아 글을 쓰고 싶었지만 참았다. 유난스럽게 썼다가 내 이메일을 추적당하고 나를 쫓아와서 너 때문에 짤렸어 하면 너무 무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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