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갈등으로 시작한다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by 조용히정진

20대 초반 안그래도 잘 뛰는 젊은 심장을 마구 뛰게 만들었던 영화가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강한 무공으로 적들을 마구 혼내주는 중국 무협영화 동방불패.

과거 크나큰 배신의 경험으로 괴로워하는 절세무공의 주인공 '영호충'은 강호를 떠나겠다고 얘기한다.

'강호'는 옳고 그름이 아닌 무공의 높고 낮음을 기준으로 평화와 갈등, 은혜와 원한, 신뢰와 배신 등이 당당히 진행되는 곳이다.

다른 사람의 무공을 흡혈귀처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흡성대법의 고수 '임아행'은 크게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푸하하하. 강호를 떠나겠다고? 인간이 있는 곳이 바로 강호인 것을..."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무공은 악날하지만 그의 말은 진실이다.


서로의 셈법이 다르고 남자와 여자는 사용하는 언어가 좀 다르다.

사랑하는 상대를 상하게 할 의도는 없더라도 다른 계산방식과 언어를 사용하는 두 사람은 서로를 아프게 한다.

결혼을 하게 되면 각오해야 할 일인데, 특히 신혼 시절에 서로 상처를 많이 주고 받는다.


맛있는 감자탕 골목이 유명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에서 생애 첫 직장을 다녔다.

거기서 운전면허증도 취득하고 결혼도 하고 많은 것을 배웠다.

직장과 거리가 가까운 북가좌동의 낡은 복도식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서로를 위해주느라 매일 행복했지만, 서로의 다름은 조금씩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런닝머신은 아내에겐 자리만 차지하는 불필요한 물건일 뿐이었다.

어차피 달리지도 않을 것을 다 안다고 한다.

(자리를 더 크게 차지하는 트렘플린이 지금 거실에 놓여있다. 나는 안되고 왜 아내는 되는지 그것이 알고싶다. )

친정에 간 아내를 위해 매일 사랑의 전화를 걸어 유모어 책 한 구절씩 읽어주던 다정한 남편은

조금씩 남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사랑의 메신저인 전화기 코드를 뽑아버리는 연락두절의 무정한 남편 모습으로 변신하여, KT직원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차 집을 방문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리조트를 예약하고 단양에 놀러가는 도중에 의견차이로 우리는 다퉜고, 임신한 상태의 아내는 불편한 마음과 몸으로 인해 즐거워야 할 단양8경 관광을 망쳐버렸다.

밥과 빵의 견해 차이로도 무지 싸웠다.


가끔 성공적으로 갈등을 해결한 것도 있다.

아내는 가끔 양치를 한 후 칫솔을 물컵에 꽂아 두곤 했다.

양치한 후 물로 입을 헹구려다 컵에 꽂혀있는 칫솔을 보면 짜증이 났다.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칫솔을 제자리에 둬야하지 않을까?”


나중에 술 한잔 하며 신혼시절 옛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집사람은 천사처럼 예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되는 성화에 칫솔거치대에 잘 있는 칫솔을 내가 심통날 수 있도록 얌전히 양치컵에 넣어 둔 적도 있다고 담담히 이야기한다.


사람의 습관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졌고, 화도 슬슬 나기 시작했다.

마주보고 대화하기엔 왠지 분위기가 험악해 질 것 같아 마주보지 않고 옆에서 대화할 수 있도록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둠이 내린 응암동 밤거리를 목적지없이 오가며 약 1시간 걸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혼 내내 잘하고 실수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아내의 입에서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불만을 들으며 매우 놀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나의 행동들이 아내를 불편하게 했구나.

말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몰랐을 내용이었다.

내가 불편한만큼 나로 인해 아내 역시 편하지 않은 부분이 많구나.

칫솔로 인한 갈등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참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결혼 이후 진심으로 깨달았다.

한밤중의 산책 이후에도 아내의 행동은 큰 변함이 없었고, 가끔씩 찾아오는 불편함에 강제로 익숙해 지려는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그냥 내가 양치컵에 있는 아내의 칫솔을 거치대에 치우는 것부터 하면 되지 않을까?"

컵 속의 칫솔을 치우는 행동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루틴으로 설정한 이후

평범했던 나의 양치 프로세스가 되돌아 왔고 아내의 습관이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달라진 것 없이 마음속으로 하나의 행동만 추가했을 뿐인데 갑자기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

양보하니 갈등이 퇴장하고 평화가 되돌아왔다.


갈등이 새로운 모습으로 재방문할 때 지난 깨달음을 잊지 않고 창의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한다.

오랜 세월 함께 한 중년 부부에게는 갈등이 없으리라 생각하는 분들에게 고한다.

인간 세상이 곧 강호다.

이전 07화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