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하루

행복의 열쇠, 문제해결능력

by 조용히정진

인연을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혼을 결심한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식장을 예약하고, 신혼 여행지를 선택하고, 혼수를 결정하고, 신혼집을 찾아내고.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하나하나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식과 신혼집을 한 달 만에 준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능하다.

우리 집이 증거다.


아주 가끔 해외토픽에서 엄마와 아이가 동물원 구경을 갔다가 아이가 실수로 사자 같은 맹수 우리에 들어 간 뉴스를 보게 된다.

그리고 위기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사자우리에 뛰어 들어가 사자(자기가 왜 맞는지도 모를 것이다)를 구타하고 무사히 구해낸 어머니처럼

특정 상황에 몰리면 인간의 능력은 정말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한 달간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닌 결과 식을 올리기 전 어느정도 신혼생활을 시작은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구색을 갖추었다.

만난지 한 달만에 결혼하기로 하고 결혼 준비기간이 겨우 한 달 이었기에

일단 부부가 되고나서 서로를 사랑하기로 했다.

사랑하기엔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짧아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하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덕분에 부부가 된 이후 지금까지 처음 만난 연인처럼 매일 데이트를 하며 살고있다.


바닷가 근사한 식장에서 근엄한 주례사가 장내에 울려 펴지는 동안 아내가 될 신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떨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낯선 타인과 인생을 건 승부를 하느라 긴장이 되었나 보다.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하지만 떨림을 진정시키고 나의 온기를 잘 느낄 수 있도록 꼭 잡고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신부를 안심시켰다.

꼭 잡은 손으로 전달되는 떨림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날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


태풍으로 하루 연기된 비행기를 타고 사이판이라는 곳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

대학생시절엔 한창 배낭여행이 유행이었건만, 돈을 벌어야 했고 기질적으로 여행에는 그리 관심이 없기에 여행을 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한곳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올인원 리조트형 신혼여행지로 사이판 PIC(Pacific Islands Club Saipan)를 선택했다.

여기서는 숙박과 식사, 워터파크 등이 이동 없이 내부에서 모두 즐길 수 있었고, 양궁 등 다양한 스포츠를 직접 체험하고 놀 수 있었는데 특히 같이 놀아주는 클럽메이트들이 있어 모든 것에 익숙하지 않은 어리숙한 신혼부부도 쉽게 즐기며 행복해할 수 있었다.

패키지로 함께 온 일행 중엔 일산에서 가구를 제작하는 회사에 근무하는 부부가 있었다.

결혼 10년차 기념으로 놀러왔다고 하는데, 그 당시엔 그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알지 못했다.


신혼의 근사한 저녁을 위해 출발하기전 고급 와인을 준비했다.

준비한 국제전화카드를 이용해 공중전화로 양가 부모님께 신혼여행지에 잘 도착했음을 인사드리고, 방으로 올라 가 멋진 와인을 한잔하며 이런저런 말을 하며 분위기를 잡아야지.

나름 고도의 전략과 전술을 준비하고 부모님께 전화드리고 룸으로 올라가 와인을 꺼냈다.


아차.

와인 오프너를 챙겨오지 않았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방법이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날 저녁 우리는 와인 없는 근사한 저녁을 보냈다.


생각해 보면 프런트에 요청해서 5분 안에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당시 우리 부부는 문제가 발생해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애송이 부부였다.

결혼을 하면 애송이부부 시기를 거쳐 어떠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해도 척척 해결하는 원숙한 중년부부의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그냥 가만히 서서 시간을 보내기만 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현명하게 잘 버텨온 세월을 가진 자만이 이국적인 해변가에서 윤종신의 해변무드송을 즐길 수 있다.


그날 밤 와인 오프너가 없음을 서로 책망하고 비난하지 않았다.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우린 왜 이리 허술하지 ㅎㅎ.


고급 와인이 있고 없고는 신혼여행지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신혼의 밤엔 와인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시작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정말 아름다운 밤이었다.


주말근무라 하루 종일 운전하고 집에 돌아오니 새벽 1시 반.

아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겨 맞아준다.

양치를 하려는데 작은 티스푼에 인삼엑기스를 잔뜩 담아 입어 쑤셔 넣어준다.

아내의 행동에는 제약이 없다.

시키는데로 해야 한다.

과학적으로는 쓴 맛이 나야 하는데, 달다.

인삼을 녹여 먹으며 하루사이 일어난 일들을 우물우물 도란도란 이야기한다.

28년이 지난 오늘 이 밤도 여전히 아름답다.


우리 부부는 사이판 PIC를 다시 찾기까지 25년 걸렸다.

25년 만에 찾은 사이판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코로나로 아무도 없는 PIC를 전세내듯 즐겼고, 저녁에 진행한 노래방 코너에서 아내를 향해 애창곡 ‘윤종신의 해변무드송’을 불러 주었다.

주기적으로 방문해주는 '삶의 힘듦' 시즌이 되면 휴대폰에 저장된 동영상을 보며 그날을 회상한다.

붉은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이국적인 해변가 리조트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25년간 잘 버텨냈음을 함께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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