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1학년때 돌봄 선생님께서 도움이 필요하시면 꼭 도움을 받으시라, 말씀하셨다. 나로서는 조금 뜬금없는 말이었기에 "네, 선생님."이라고 대답하면서도 내심 불쾌했다. 수업시간도 아니고, 돌봄 교실에서 놀다가 조금 소란스럽게 구는 걸로 지나치게 예민하시구나 여겼다.
어쩌면 학교에서의 아이와 집에서의 아이가 다를 수 있겠구나. 아마도 꽤 다를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것들을 이제는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집에서 보는 모습과 뭐가 그리 다르겠어 라고 생각했기에 선생님께서 사용하신 그 '도움'이라는 단어는 다소 성급했고 신중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병원을 예약한 후 진료날짜를 헤아리다가 그때 생각이 났다. 성급했고 신중하지 못한 건 내가 아니었을까 조금 후회되었다.
학부모 상담에서 돌아온 날 아이에게 물었다.
"너 수업시간에 교과서 안 펴?"
펴고 있다고 대답하는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다.
"너는 펴고 있다고 생각할 테지만 어쩌면 네가 안 펴고 있는 것 같기도 해."
최대한 아무 일도 아닌 듯 말하고 싶었는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이는 살짝 억울하다는 얼굴로 아예 안 펴고 있는 건 아닌데..... 우물쭈물 거리며 내가 화가 났는지를 살피기 위해 계속 눈치를 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표정이 없던 얼굴에 두려움과 피곤함이 묻어나고 있어 안쓰러웠다. 아이는 지금 나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다.
손을 꼭 잡고 "괜찮아, 엄마가 화내려고 묻는 게 아니야. 이제라도 같이 잘 고쳐보자고 이야기하는 거야."라고 했다. 아이는 조용히 내 눈만 쳐다봤다. 돌이켜 보니 늘 이런 눈과 이런 표정으로 내 기분을 읽고 있었다.
이런 애를 두고 무슨... 남의 기분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걸까. 얘가 분위기를 못 읽는다니. 얘는 너무 잘 읽어내고 예민해서 문제였다, 나한텐. 그리고 어쩌면 그게 문제의 시작인 걸까. 원래 아이들이 다 이렇게 엄마 표정을 끊임없이 살피나? 머릿속이 자꾸만 복잡해졌다.
수업이 바뀌어서 교과서를 새로 꺼내야 하거나 전담실로 가야 할 때 그러지 않는 대신 뭘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니 한참을 생각하던 아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다고 했다.
어리둥절해하다가 친구들을 따라 전담실로 이동하지만 지우개랑 연필이랑 공책도 찾아야 해서 다시 교실로 돌아올 때도 많다고 했다. 이미 학부모 상담 때 선생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쉬는 시간에 미리 준비하면 되지 않을까 했더니, 그냥 어리둥절해서..... 라며 또 우물쭈물거렸다.
담임선생님께서 아이한테 언어능력이 뛰어나다고 말씀하셨듯이(너무 단점만 말하기에 머쓱하셨는지 선생님께서 겨우 해주신 칭찬이었다.) 아이는 말을 제법 잘한다. 아기 때부터 말을 빨리 하기 시작했고 아이답지 않게 논리가 정확했다. 어릴 때는 시적인 표현도 곧잘 쓰더니 자라면서는 그 능력을 자기 방어나 변명에 주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우물쭈물 거리는 법이 없이 늘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엄마, 내 얘기 좀 먼저 들어보고 다시 엄마가 얘기하면 안 될까."
내가 아이를 야단칠 때 뭔가 억울한 점이 있거나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을 때면 아이는 항상 이런 말을 하며 자기 얘기도 좀 들어보라 했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서 왜 교과서를 펴지 않느냐, 전담실에 갈 때 왜 허둥대느냐는 질문에 우물쭈물거리니 어색하고 이상했다. 머뭇거리던 입과 허공을 향해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마음 아팠다. 그 시간들이 아이의 머릿속엔 어떠한 여백으로 남아 있는 것인지 어리둥절이라는 표현 외엔 달리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아이가 그 여백의 시간들에 '어리둥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니 역시나 마음 한 구석이 쪼이는 듯 아려왔다. 그 단어는 아이와 내가 평소 잘 쓰는 단어가 아니므로 누군가가 그 단어를 사용하며 뭐 하느냐 재촉했던 것은 아닌지, 혹은 그 시간들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어 스스로 어리둥절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인지. 공백과도 같은 그 어리둥절함 속에 놓인 아이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그 속에 아이가 느꼈을 당황스러움이나 상처는 없었을지, 아이가 그러한 것들을 스스로 극복해 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는지를 가늠해 본다.
고작 그런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흐르는 걸 보니 좀 더 단단해져야 하는 건 오히려 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병원 진료는 금방 끝났다. 의사 선생님께선 상냥한 얼굴로 무슨 일로 오셨느냐 하셨다.
아이가 산만하다는 지적이 잦아서 ADHD나 우울증 또는 핸드폰 중독 같은 것들이 의심되어서 왔다고 하니 검사 전에 약이 필요하냐 물으셨다. 아니요!라고 대답하던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꽤 컸기에 서로 놀랐다.
아이와 진료실 밖에서 대기하며 보았던 다른 아이들이 스쳐 지나갔다. 옆에서 아이도 느꼈는지 보고 있던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놓더니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엄마, 쟤는 진짜 금쪽이 같아."라고 했다. 아이의 두려움이 느껴져서 괜찮다며 손을 꼭 잡아줬었다.
밖에서 그랬던 것처럼 옆에 앉은 아이 손을 꼭 잡았다.
"검사 후예요. 필요하면 그때 처방해 주세요. "
나도 모르게 조금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내가 뭘 놓쳤을까. 며칠 동안 내내 생각했다. 놓쳤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니 모든 순간들이 다 그러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나는 꽤 바빴고 늘 피곤했으며 남편과는 서로의 고단함을 이유로 아이 앞에서 자주 다퉜다. 코로나로 유치원을 가지 못 하던 긴 시간 동안 아이의 친구는 휴대폰뿐이었다. 나는 하루종일 아이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할머니와는 어떻게 지내는지 제대로 묻지도 않았던 거 같다.
어째서 그랬던 걸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 그저 잘 있겠지 생각하며 궁금해하지 않았던 그 시간들. 정말로 아이가 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 그때? 나는?
조금씩 시간을 거슬러 기억을 더듬어 간다.
어린이 집 등원길에 아이는 개미구멍을 자주 들여다봤다. 개미의 행렬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간 출근시간이 늦어지기 때문에 늘 재촉하고 다그쳐야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한 번도 개미를 지켜보는 아이를 기다려 준 적이 없다. 등원을 위해 아이가 스스로 신발을 신을 때도, 길에 버려진 딱지나 인형을 궁금해할 때도 기다려주거나 그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못했다. 늘 '빨리빨리'를 반복했고 '그런 건 안돼.'라고 말했다. 왜 그 5분을 기다려주지 못했을까. 개미는 생각보다 빨리 구멍 속으로 사라졌는데.
아이가 5~6살 즈음 남편과 참 많이도 다퉜다. 남편과 다퉜던 다음 날. 출근길에 아이가 안고 뽀뽀해 달라고 하길래 화가 난 마음을 아이한테 쏟아내며 "아빠한테 해달라고 해. 엄만 늦었어."라고 말하며 쌩하니 나와버렸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뒤통수에 꽂혔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떠오른다.
늦었다고 그냥 가면 안 돼, 하던 울음소리가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 걸까.
아이는 3살까지 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키울 수가 없어 할머니가 맡아 키우고 주말에만 집으러 데려왔었다. 4살이 되는 해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5살 때였나?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아이가 물었다.
"엄마, 할머니랑 있을 때 밤에 무서워서 엄마를 불렀는데, 엄마 그때 왜 안 왔어?"
무슨 말이지 싶어 너무 놀랐지만 태연한 척 "엄마랑 아빠는 일하러 갔었는데 밤에 꿈꿨어? 무서웠어?"라고 물었지만 대답 없이 고요히 있다가 그대로 잠들었던 날이 있다. 아이의 어린 기억 속에서 나는 그저 뒷모습이거나 불러도 오지 않았던 사람은 아닌지 자꾸만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니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던 시간, 함께 하지 못 했던 시간, 기다려주지 못한 시간들이 많다. 그 모든 시간들이 아이의 머릿 속이나 마음속에 어떠한 여백으로 자리 잡은 채 몸집을 부풀려 갔던 걸까.
사실 이런 기억들을 지금의 상황 속에 끼워 넣은 후 어떤 인과관계를 짜내며 '그랬구나. 역시 그랬던 거야.' 하는 것은 조금 쓸데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에선 크게 도움 되지 않을 죄책감 혹은 자기 연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저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하고 싶은 건지도. 사실 아이는 특별한 문제가 있다기 보단 이른 반항심이라든지, 수업이 휴대폰 게임만큼은 재밌지 않다는 이유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그저 남자아이다운 단순한 사고에서 기인한 품행이 방정하지 못 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담임선생님께선 특별한 문제가 아닌 어쩌면 그저 품행방정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셨다. 하긴, 그것 또한 문제긴 하다.)
어쨌든 다음 주에 검사를 앞두고 있는 중이니 끊임없이 아이와 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때 대답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때 함께 해주지 못했으니까, 그때 기다려주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다시 내 차례가 왔나 보구나. 그저 덤덤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이의 그 어리둥절함 속에 숨겨진 어떤 여백이 있다면, 만약에 정말로 그러하다면, 스스로 그 여백을 채울 수 있을 때까지 이제야말로 내가 기다려줄 때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자꾸 이러면 엄마 먼저 간다."라고 했을 때 개미구멍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아이가 깜짝 놀라서 내가 정말로 먼저 가버렸나 하며 살피던 표정이 떠오른다. 그 표정에 참았던 눈물이 울컥 솟아오른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아이가 나를 찾으며 살필 때 "응, 엄마 여기 있어. 괜찮아."라고 대답하며 가만히 기다려줘야 할 때가 왔나 보구나. 영영 놓칠 뻔했는데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와서 어쩌면 다행이구나. 그냥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담담한 표정으로 기다림을 다짐하며 하루씩 하루씩 그렇게 단단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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