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배터리 검사를 위해 집에서 미리 문장완성검사지를 작성했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 쓰면 되는 거야. 틀리고 맞고 이런 건 없어."라고 했더니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검사지를 작성했다.
작성을 끝낸 검사지를 봉투에 담으면서 살펴보니 역시나 짐작했던 맥락의 대답이 있었다.
화를 잘 내는 엄마와 그에 대한 아이의 걱정.
그러고 보면 아들은 어릴 때 만화영화를 보다가도 괴물이 나오면 엄마 같다고 울었다. 모아나에 등장하는 그 테카. 늘 분노에 가득 차 있던 테카도 꼭 엄마 같다고 했었다. TV 광고에 나오는 아이들의 그림 속 엄마도 전부 용가리처럼 불을 뿜고 있으니까 뭐...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니 괜찮아,라고 말해보지만 사실 괜찮지는 않다. 아니, 대체 내가 뭘 그렇게 화만 내었다고. 한편으론 내심 억울한 맘도 있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화낼까 봐 그렇게 걱정이 되면 말을 잘 들으면 되잖아?!
불필요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겠다고 단단히 맘을 먹어서 그런 걸까. 이제는 또 불쑥 그런 서운함이 밀려드는 것이다. 이러지 말자. 뭐든 이제 겨우 시작인 일이니.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마음을 다독여 본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이란 질문도 있었기에 긴장했는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행히 귀신이었다. 덕분에 가장 무서운 존재는 면했다. 살다 보니 내가 귀신 덕을 다 본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아들은 안내받은 검사실로 갔다. 30분 정도 이것저것 검사를 했고 임상심리사와 1시간이 넘도록 상담을 했다. 전체 검사는 2시간이 넘었던 것 같다.
아들의 검사 후 부모와의 상담이 있었다. 남편도 나도 꽤 긴장하며 상담실로 들어갔다.
검사에 대한 최종 판단은 의사 선생님께서 하신 후 2주 후에 알려주시겠지만, 임상심리사의 견해로는 ADHD라기 보단 불안이 너무 커서 주의전환이 되지 않는 거 같다고 했다. 검사를 하는 내내 아들이 제일 많이 했던 말이 "틀렸나?", "틀리면 어쩌지?"라는 말이라고 했다.
상담내용은 이랬다.
1. 불안이 커서 늘 긴장 상태다.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이며 집중력이 없다기보단 오히려 꼼꼼한 편인데 불안과 두려움이 크다 보니 회피와 방어본능으로 주의 전환이 되지 않는다.
2. 새로운 자극이나 낯선 환경에 놓일 경우 불안과 변화에 대한 저항이 커져 새 학기는 늘 힘들다.
3. 불안함이 커질수록 회피하고 싶어 하여 교사와의 갈등이 있을 수 있다.
4. 상대방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계속 눈치를 살피며 수행능력이 낮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다.
5. 어휘력이 고차원적이라 또래 간 소통이 힘들다. 사용하는 단어가 달라서 서로 못 알아들으며 어른과의 대화가 더 편하다.
6. 예민한 것에 비해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엄마의 감정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피드백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이며 단편적인 감정만 느낀다.
7. 언어 능력이 뛰어난 것이 비해 비언어적인 능력이 떨어진다. 중간 영역의 감정을 알지 못한다. 감정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
8. 주변 환경이나 시선 등 전반적인 흐름은 인지하지만 개별적인 속성 파악이 힘들며 자신의 기준에 맞거나 타당하다고 생각해야 움직이므로 감정에 호소하는 건 효과가 없다.
9. 청각적 주의력이 낮은 편이라 한번 말하면 잘 못 알아듣기도 한다.
10. 상대방의 피드백에 따라 자존감이 유동적이므로 구체적 목표를 설정하여 성취물을 직접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불안이 크고 외부 자극에 대한 감정 처리 능력이 떨어져 회피본능이 강한 것에 비해 주변의 디테일한 움직임이나 감정을 읽지 못하니 주의 전환이 잘 되지 않으며 조금 다른 방식의 방어기제가 작용한다. 상담 내내 조금씩 멍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아 가며 이해한 바로는 이런 말 같았다.
결국, 아들이 수업시간에 멍하니 있는 이유는 불안과 긴장이 높아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함이었고 아들이 남의 기분을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 또한 그저 부정적인 피드백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뿐 오히려 남의 감정을 읽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들이 말한 그 '어리둥절함'이 이거였을까.
이게 오히려 좀 더 금쪽이 같잖아!?
그 순간에도 어느 쪽이 더 금쪽이 같을까, 어느 쪽이 조금이라도 내 책임을 덜어줄까를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어쨌든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한 것이다. 아들의 성향이라는 그 특징들... 우리 모두 누구나 다 조금씩 그러지 않나? 하다가, 사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싶었기에 결국 내 탓이구나,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불안이 커서 그 불안이 분노로 쉽게 이어진다. 나의 불안과 나의 방어가 아들에게 전이된 걸까.
그 불안의 근원에 내가... 엄마가 있을 것 같았다.
아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귀신이지만 그 귀신은 결국 엄마가 아닐까. 문항이 좀 더 구체적이었으면 그런 대답까지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모든 이야기들이 나를 가리키고 있는 듯하여 상담 내내 상담사의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죄다 나를 꿰뚫는 이야기들이었다.
아들이 잠겼다가 깨어났다가 한다는 그 어리둥절함. 그 속에 지난 시간부터 지금까지의 아이의 모든 시간들이 응축되어 시공간을 뒤흔들며 망망히 펼쳐져 있는 듯했다. 무언가가 아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걸까. 이건 좀... 뭐랄까. 어, 약간 블랙홀 같구나 생각하다가 아니다, 그건 너무 새까맣고 무서우니까 그냥 오로라 정도라고 할까. 아예 다른 거겠지만 어차피 멍해지는 건 같으니 그냥 이쁜 거 하자,라고 생각했다.
최종 검사 결과는 다음 주에 나온다. 아직까지 모든 것은 견해일 뿐이지만 오로라만큼은 확실하다.
아들의 머릿속에 가끔 오로라가 펼쳐진다. 나는 그 머릿속에 아들만의 북극성을 만들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그 오로라를, 북쪽 하늘 위로, 밀어내야만 한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