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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Aug 06. 2023

[편지]우리의 점괘

너에게 쓰는 편지

기억나? 몇 년 전 연초에 내가 점을 보러 갔잖아.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사실 난 주중에 끝내지 못했던 일을 하러 출근했던 건데 사무실의 누군가가 예약해 놓은 점집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며 '가볼래?'하고 권하더라고. 아는 언니가 거길 갔는데 그 언니가 들어가자마자 점선생님(이런 분들은 뭐라 불러야 하는 걸까?)께서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는 만나지 마라고 호통을 쳤대.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던 거지. 그 이야기를 해주며 엄청 용한 곳이래요,라고 하더라고.

그래? 그럼 점이나 한번 볼까 하며 얼떨결에 가게 되었어. 마침 사무실 근처였기에 잠시 다녀오기 좋았어.

신점과 사주를 같이 보는 곳이라기에 조금 긴장했지. 느낌 탓이었을까. 입구에서부터 서늘하고 오싹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공기가 조금 다르긴 했어. 바깥보다 한 톤 정도는 다운된 듯한 주변 풍경 때문에 무채색의 공간에 놓인 듯한 느낌이었어. 알다시피 나는 귀신의 존재를 믿잖아? 불쑥 무서워졌지.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에서 치이로의 가족들이 터널 지나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기분 같기도 했어. 낯설었고 뭔가 좀 이상했지. 잘못 왔나?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려 할 때, 나의 기척을 눈치챈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어. 선생님은 동작을 멈추곤 나를 지그시 보더라고. 한참을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었던 것 같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살피고 있는 건지, 나를 보고 있긴 한 건지. 도무지 생각을 읽을 수가 없는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잠시 후 "들어와." 하셨지.


네에, 넵. 쭈굴거리며 들어갔어. 목 뒤부터 감겨드는 정체 모를 냉기에 마른침을 삼켜야 했지. 엄청 용한 곳이래요, 라던 사무실 직원의 말이 떠올랐어. 과연 기운이 남다르구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어. 대뜸 귀를 보자고 하기에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어. 역시나 한참 동안을 나를 노려보듯 보시더니 태어난 날짜와 시를 물으셨어. 그러더니 받아 적으라고 하셨지. 1번, 2번, 3번... 하시며 하나하나 불러주시기에 그 순간, 어랏? 이건 조금 사이비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아. 쌀을 던지며 허공을 향해 눈을 뒤집는다거나 휘파람을 불면서 저 너머의 어디론가를 보며 무언가를 두서없이 중얼거릴 거라 생각했는데 1번, 2번, 3번. 번호까지 붙여가며 정돈된 말씀들을 하는 거 아니겠어? 아......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리긴 했지. 뭐야? 그냥... 사람이잖아? 괜히 쫄았네.

암튼 그때 받아 적은 내용이야.


1. 87세까지 산다.

2. 부모한테 받을 것이 10원도 없다.

3. 살 길이 생긴다. 음력 4월 이후로 8년간 큰돈을 번다.

4. 60세가 지나면 평생 돈고생 안 한다.

5. 증권이나 금전거래하면 무조건 망한다.

6. 퇴직이 없고 75세까지 직업을 가진다.

7. 남편은 돈이 아까워서 바람을 못 피운다.

8. 일광에서 울산 태화강 사이의 땅을 사야 한다. 30배가 오른다.


그날 너한테 점집 다녀온 이야기를 해주며 '우리 디게 오래 사는데 60살이 넘을 때까진 내내 돈 걱정을 하며 살 팔자인가 봐. 주식을 하면 망하니까 나중에 일광에 땅 사래. 아! 맞다. 너 바람은 안 피운대, 돈이 없어서. 돈 없는 게 좀 다행이지 뭐야? 아니, 근데 그 사람이 우리 둘 다 부모님한테 받을 것이 없다는 건 어찌 알았을까? 나 얼굴에서부터 빈티가 나나?'라는 말을 했던 거 같아.

일광은 이미 진작에 다 올랐는데? 굳이 점 보러 안 가도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야. 너는 그렇게 말했고, 그래? 그런가? 암튼 주식하지 마. 망한대. 나는 답했지.

그리고 우린 둘 다 주식을 했어. 도대체가 말이야... 말도 안 들을 거면서 점은 왜 보았나 몰라. 나도 망했고 너도 망했어. 확실히 용하긴 용한 곳이 맞았나 봐. 정말이지 쫄딱 말아먹었지, 우리 둘 다, 똑같이. 다른 것이 있다면 너는 나보다 한 20배가 넘는 금액을 날렸다는 거?


너,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지 알아?


난 말이야. 그 일이 대해선 꽤 오랫동안 '나'를 생각했어. 쉽게 살아온 인생은 아니었으니 시련 앞에선 어느 정도 초연할 거라 자부(?)했건만 이것만큼은 정말 날벼락이었지. 앞으로 어쩌지? 내 인생은 어쩌지? 내내 생각해야 했어. 어떻게든 감당해야 했으니, 그 일이 나한테 가져다준 것은 꽤나 오랫동안 갚아야만 하는 빚일 테고 그 일로 내가 잃은 것은 어쩌면 가졌을지도 모르는 조그마한 삶의 여유 정도라고만 생각하기로 했지.

사실, 네 생각은 하지 못했어. 너까지 생각해 줄 경황이 내겐 없었어. 그 일에 대해서만큼은 넌 그저 사고뭉치였으니까. 처음엔 저 웬수를 어쩜 좋지? 죽여? 살려? 했었고, 이제는 조금 덤덤해진 마음으로 이런, 사고뭉치야, 정도의 시선인 거지. 솔직히 말하면 내가 너를 용서(적당한 단어가 뭘까, 고민했지만 찾지 못했어)하면 정리되는 일이라 생각했어. 내가 이 상황을 받아들였고 우린 여전히 함께 할 테고 같이 해결해 나갈 테니 그걸로 잘 마무리되는 거라 생각했지.


나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아. 원래부터 월급이란 것은 사이버머니처럼 그저 통장을 스치고만  있었으니, 내가 이 모든 것들의 실체를 깨닫기도 전에 매달 무언가가 쌓여가거나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었기에 더 이상 생각할 필요는 없었어. 적어도 돈 문제에 대해선 그랬지.

나는 이제야 너를 생각해. 요즘, 아니 정확히는 아들 문제로 우리 가족 모두가 심리검사를 했던 때부터 너를 생각하지. 그때 난, 문장완성검사를 하면서 '내가 다시 젊어진다면'이라는 문장에 대해 남편과 일찍 연애할 거다,라는 답을 쓰고 있었어. 문득, 너는 무얼 쓰고 있을까 궁금했어. 그 질문에 대한 네 답을 살펴보다가 네가 써 놓은 몇 가지를 더 보게 되었지.  


내가 다시 젊어진다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노력할 것

행운이 나를 외면했을 때 그건 원래 내 것이 아니지

나의 장래는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어리석게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가정이 무너지는 것

내가 보는 나의 앞날은 희망적이지는 않다


그걸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어. 너를 게 되면 어쩌나. 갑자기 겁이 났지.   빨리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너는 착한 사람이고 여린 사람인데.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일에 몹시 아파하는 사람인데. 나를 힘들게  일에 대한  절망과 죄책감을  몰랐을까. 너를 짓누르고 있는 것들이 뭔지에 대해 어째서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데  정도쯤은 당연히 네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저 모른  내버려  걸까. 그제야 너를 살피기 시작했어. 여전히 네가 없으면  되는 나와 우리를 알려주고 싶었어.  정도쯤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 까진 아닌  같고(헤헷^^;;)..., 어쨌든 우리가 감당할  있는 일이니, 너는 여전히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난 말이야, 흰머리가 늘어나고 머리숱이 줄어드는 게 더 무서워. 그건 정말 돈으로도 안 되는 거라고. 그거 말곤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아, 귀신도 조금 무섭긴 해.)

 

용하다는 점선생님이 살 길이 생긴다고 했어. 음력 4월 이후의 8년간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구우!!!  사실, 살길이 안 생기면 또 어때? 우린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가고 있잖아? 그래도 60살이 지나면 평생 돈 고생 안 한다니 다행이지 뭐야. 난 늙어서까지 계산기 두드리긴 싫거든. 60살이 되면 프릴 잔뜩 달린 원피스 입고 너랑 세계여행이나 다닐 거야.


알지? 나는 네 덕분에 계산기를 제법 잘 두드리는 사람이 되었어. 득과 실에 대해선 꽤나 잘 따져본다고. 그런 내가 확실하게 말해주는 거니 믿어도 돼.

너는 여전히 든든한 사람이야.

나의 미래를 맡긴 채 '우리'를 꿈꾸기에 충분한 사람이지.

그러니, 너도 이제 그만 너를 용서해. 내가 이렇게나 사랑하는 너를, 네 스스로는 도무지 사랑하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고 있으니... 내가 정말로 많이 아프고 서운하단 말이지. 너를 만난 후의 내 인생은 대체로 무탈하고 대체로 행복해.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우리?


내일은 네 생일이야.

넌 가끔 나보다도 더 너를 모르는 거 같아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는 너'를 너한테도 알려주고 싶었어.

이제 너랑 화해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랑, 너도 이제 그만 화해해. 나를 위해서라도, 조금만 더 성실하게 너를 사랑해 줄래? 나는, 너를, 조금도 잃고 싶지 않아.

가끔은 단 한 톨의 걱정도 없이 그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덕분에 나도 그 행복한 남자 옆에서 무진장 행복한 여자가 되어 볼 테니... 내일은 네 생일이니까 우선 내일부터 시작해 보자. 그리고 그러한 내일을 자주자주 만나보자, 우리.


생일 축하해.

이 계절의 뜨거움과 푸르름이 언제나 너와 함께 하길. 너를 위해 두 손 그러모으며 눈을 꼭 감아.


추신. 아! 점선생님이 틀린 것이 하나 있어. 너는 돈이 없어서 바람을 안 피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이지. 아휴, 잠시 한 눈이라도 좀 팔지, 천날만날 나만 보고 있으니 좀 귀찮긴 하네. 헤헤헤헤헷.


#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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