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또 나한테 똥침을 했다.
나는 40대 중반으로, 자랑은 아니지만 남편보다 나이도 많고 흰머리도 많다. 직장에선 직원이 5명이나 있는 사무실의 실장이고 조직 내에선 아주 가끔이지만 강의나 컨설팅 요청도 받곤 하는 등 개미똥구멍만 하여 눈치채긴 많이 힘들지만 나름 사회적 지위라는 것도 있기에 이렇게 함부로 똥침을 해도 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매번 뒤에서 급습하여 똥침을 갈기거나 갑자기 바지를 휙 내린 후 낄낄거리며 도망가곤 한다. 그럴 때마다 진짜로 너무너무 짜증나고 약이 오른다. 열 살짜리 아들한테 하는 짓을 나한테도 똑같이 하고 있는데, 열 살짜리 아들도 기겁하며 싫어하는 걸 마흔이 넘은 나는 오죽하랴.
"하지 마라고오, 쪼옴!!" 버럭 소리를 지르면 잠시 시무룩해진 얼굴로 안 그러는 척하고 있다가 내가 방심한 틈에 다가와 불쑥 똥침을 하며 혼자 신나 한다.
죽여버릴까. 생각하다가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다.
남편이 아직은 나를 누나라고 부를 때, 이제 막 발령을 받아 일을 시작했던 우리는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학교운영위원회라는 것을 한 후 회의록을 써야 한다는데 그게 뭔지를 몰라 퇴근 후 같은 지원청 소속 동기들끼리 어느 사무실에 모였다. 모르는 건 서로 물어가며 같이 해보자는 명목 하에 모인 거였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돌들끼리 모여 머리를 맞대곤 겹겹이 쌓아 올린 돌을 맷돌 마냥 갈아대며 낄낄거리는 것이 다였다. 그리고 그런 자리엔 늘 남편도 같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무언가 농담을 건네며 장난을 쳤고 늘 잘 받아주던 남편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두 손으로 내 팔을 꼭 붙잡았다. "하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모르는 일을 의논하며(서로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자주 통화하는 사이였고, 매번 서로에게 시덥잖은 장난을 치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 마라고 하니 조금 서운했다.
불쑥 '싫은데. 나는 너랑 그런 거 해도 되는 사이이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들 중에서 남편한테 마음대로 장난치고 조금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면 좋겠다고 내내 생각했다. 나만이 너를 하찮게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건 조금 뒤에 깨달았지만 어쨌든 시작은 그러했다. 그날부터 '내가 지금 어디 어디에 있는데 빨리 나와,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하는 진상짓을 제법 많이 하긴 했다. 아, 이게 좋아하는 거구나,를 깨닫고 나서는 나랑 사귀자고 조르며 남편이 근무하는 학교로 찾아가곤 했다. 그 학교 교무부장 선생님이 남편한테 소개팅을 시켜주려고 하기에 "어머, 제가 여기까지 왜 왔을까요? 그저 친한 동기라서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지며 훼방을 놓기도 했는데, 남편 역시 말은 싫다고 하면서도 표정에선 딱히 그런 기색이 없길래 내 맘대로 남편이 하지 마라는 건 다 해버렸다.
그즈음부터 퇴근 후엔 남편과 을숙도에 가곤 했다.
지금은 없어진 것 같은데 그때만 해도 을숙도엔 자동차 극장이 있었고 어느 날 문득 이제는 때(?)가 왔구나 싶었다. 당시 상영 중이었던 '도둑들'이란 영화의 가장 늦은 시간을 골라 남편에게 가자고 했다. 그래,라고 대답하며 고분고분 따르기에 나랑 한 마음 한 뜻이구나 생각했다. '좋아, 드디어 오늘이다.' 남편을 향해 결의에 찬 눈빛을 보내며 세찬 고갯짓을 했다.
오늘에야말로 사귀고 만다. 무조건 오늘부터 1일이다.
깜깜해진 어둠 속에서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며 각오를 다졌다. 잠시 후 영화가 시작되었지만 어차피 나는 영화를 보러 간 것이 아니었기에 영화 따위 무슨 내용이든 내 알바가 아니었다. 그저 남편이 언제쯤 내 손을 잡아올까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너무 바빴다. 내 손의 위치가 어디에 있어야 자연스러울까. 시트의 각도는 어느 정도가 좋을까. 내가 덥석 마주 잡으면 너무 없어 보일까. 한 번쯤은 뿌리쳐야 할까. 아니지, 이 야심한 시간에 내가 먼저 자동차 극장을 가자고 했는데 굳이 뿌리치는 것이 의미 있을까. 내내 그런 것들을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 얼간이 같은 놈은(당시 심정이 딱 그랬다.) 영화에만 잔뜩 집중한 채 쪼다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키득거리기에 바빴다. 잔뜩 뒤로 젖혀진 시트에 기대어 있던 나는 누가 봐도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남편은 나를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채 정자세로 영화만 봤다.
재밌냐, 병신아.라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날 자정이 훌쩍 지나긴 했지만 옷깃 하나 흐트러진 데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고,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한테만 사정없이 등짝을 얻어맞았기에 억울했다. 분통이 터져 아침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다가 친구들과의 카톡방에 내가 새벽까지 자동차 극장에 있었는데 집에 너무너무 무사히 돌아와 버렸다, 이 새끼는 혹시 고X일까?를 물으며 씩씩거렸고, 친구 하나가 나는 같이 여행을 갔는데 한 침대에 누워 있던 남자가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은 채 먼저 코 골며 잤다는 말로 응수해 버려 내 억울함에 대한 공감과 동정을 얻는데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지난날의 나는 남편이 나를 함부로 대하며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대하는 등 하지 마라는 짓만 골라서 해주길 바라기도 했었다. 그러니 이런 똥침쯤은 참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40대 중반에 그저 멍하니 똥침이나 당하는 여자가 딱히 우아해 보이진 않아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쫌!!"
내 고함소리에 후닥닥 도망가는 모양새가 10살짜리 아들과 똑같아서 금세 마음이 누그러들고 마는 건 남편한텐 절대 비밀이다.
#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