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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Jul 14. 2023

어떤 순간의 밀도

"자자, 빨리 해치워~~어 버리자구우우~~"

남편이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들에게 분수와 소수의 개념을 알려준 후 문제를 풀라 하고 있었고, 아들은 풀어야 할 문제가 너무 많다고 울먹이듯 투덜대던 중에 남편이 그리 말한 것이다.

자자, 빨리 해치워~~어 버리자구우우~!

나는 안방 침대에 누워 책을 읽던 중이었는데 남편의 그 말을 듣고 신이 나서 뛰쳐나갔다. 남편에겐 어떤 순간의 짜증과 곤란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특유의 유머와 여유가 있는데 나는 그러한 순간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것이다.

남편의 말투와 그 말들을 품고 있던 리듬과 그 음절 하나하나에 담겨 있던 익살을 흉내 내며 아들에게 남편의 말을 따라 해 보였다. "해치워어~~ 버리자구우우~~"  가끔씩 남편이 "컴온~"이라고 하며 무언가 장난스레 재촉할 때의 점핑까지 흉내 내었더니 아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 아빠가 언제 그렇게 이상하게 했어?"

그렇게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다가 아무 일도 아닌 듯 고요하게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랑 눈이 마주쳐 서로 빙그레 웃었다.  


1분도 되지 않았던 그 시간 속에 내가 좋아하는 특유의 온기와 다정함과 익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순간에 오고 갔던 말들과 주고받은 눈짓과 울려 퍼진 웃음소리가 너무 좋아서 며칠 동안 내내 그 순간들을 반복하여 재생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 순간들이 잊혀 간다는 것이 아쉬웠다. 지금도 1초 전보다는 그 순간에 대해 잊어버렸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순간들을 가득 채웠던 모든 것들이 조금씩은 옅여지고 느슨해지고 있는 중이다.


황진이의 시 중에 동짓달이란 시를 좋아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넣어뒀다가 님이 오신 밤에 굽이굽이 펴리라 하던 시. 가끔 내게도 그렇게 밀도 높은 순간들이 찾아오는데 그럴 때면 그 순간들을 어딘가에 넣어둔 채 더하고 빼어낸 후 길게 펼치듯 꺼내 쓰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비가 지루하게 내리고 있는 계절이다.

아침부터 나지막하게 내려앉은 하늘에선 사정없이 비가 쏟아져 내려 출근길인데도 퇴근길 같았다. 아침이 저녁 같고 번개 치는 밤은 새벽 같고 어쩐지 시간이 잔뜩 왜곡된 날들이 반복되는 중이라, 이 지루한 시간의 뒤틀림을 한 움큼 집어 들어 나의 밀도 높은 순간들 속에 섞어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자자, 빨리 해치워버리자구우~~" 하던 남편의 말들과 몸짓들이 잊혀 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


#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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