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연애

by 날아라빌리

"선생님이 연애하지 말라고 했어."

열 살 아들이 말했다. 했던 소리 또 하는 것과 들었던 소리 또 듣는 걸 무지하게 싫어하는 녀석이 저 말을 몇 번이나 하기에 '아, 디게 연애하고 싶구나' 생각했다. 쪼꼬미 주제에. 참나. 웃겼다.

너 연애가 뭔지 알아?(심드렁)

알지, 남친 여친이잖아.(발끈)

남친 여친 되면 뭐 할 건데? 뭐, 같이 떡볶이라도 먹을 거야?(피식)

엄마, 지금 나 놀리는 거야?(정색)

아... 설마요, 아닙니다. (웃참)


+ 아들이 유치원 졸업을 할 때 친하게 지내던 여자애가 서운해하며 일미분식(동네 분식점이다)에서 떡볶이라도 먹자고 했던가, 졸업하면 떡볶이집 앞에서 만나자고 했던가, 암튼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들은 아아~주우 꼬맹이였기에 떡볶이를 물에 씻어 먹던 시절이었다. 떡볶이도 못 먹으면서 무슨 떡볶이 데이트냐며, 남편이랑 둘이서 아들을 놀리며 키득거렸었고 그때부터 우리 집에선 '데이트=떡볶이'라는 비공식적인 룰이 생겼다. 물론, 아들을 놀릴 때 주로 사용하는 룰이다.


그 후에도 아들은 "선생님이 연애하지 말라고 했어. 우리 반은 연애금지야."라는 말을 종종 했다.

선생님이 기획사 사장님이야? 양현석이야? 이제는 떡볶이도 제법 잘 먹으니 그 정도야 해도 될 텐데 싶었지만, 선생님이 하지 마라 했으니 안 해야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호응해 줬다.


어느 날 아들이 또 말했다.

"엄마, 선생님 말이 맞았어. 연애하면 너무 불편할 것 같아. 선생님이 한번 더 연애 금지라고 했어."

음......

다 큰 어른이야, 연애 때문에 여러 가지 곤란한 점이 있겠지만 고작 초3이 연애 때문에 불편할 일이 뭐가 있을까.

"글쎄. 뭐가 불편한 걸까? 도대체 너네 반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봐봐, 엄마. 우리 반 수지는 2학년때부터 다 사귀고 있는데, 아! 엄마, 수지가 형아보다(중2병 걸린 사촌형이 있다. 내가 알기로도 여자 친구가 꽤 많이 바뀌었다.) 더 많이 사귀었어. 암튼 수지가 3학년때는 도윤이랑도 사귀고 윤재랑도 사귀고 영재랑도 사귀다가 헤어졌는데, 하필 이번 모둠에서 수지가 도윤이랑 영재랑 같은 모둠인 거야?! 그래서 지금 수지가 모둠에서 말할 사람이 한 명밖에 없어. 4명이서 한 모둠인데 2명이 옛 남친이야. 얼마나 불편하겠어."


아....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으나 간신히 참아내었다. 아들이 제법 진지했기에 박수를 크게 치며 맞장구를 쳤다.

"선생님 말이 맞네, 맞아. 너네 반 선생님은 진짜 맞는 말씀만 하셔. 엄마는 너네 선생님 너무 좋아."

"어, 선생님 말이 맞았어. 우리 반은 연애 금지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들은 적어도, 연애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스승님의 가르침에 철저히 따를 기세였다.


주말이면 아들한텐 도희라는 친구의 전화가 종종 걸려 온다. 옆에서 들어보면(아들은 늘 스피커 폰으로 통화한다. 시끄러워서 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항상 그런다) 같이 주니어카페에 가자는 이야기다. 옆에서 듣던 내가 속닥거리며 "간다고 해~ 같이 가자고 해~"라고 코오~치를 해주어도 어쩐지 아들은 시큰둥하기만 하다. 도희라면 내가 어린이집 시절부터 봐서 아는데 웃는 얼굴이 아주 깜찍하며 성격도 꽤나 명랑하다. 주니어 카페에 같이 가자는 도희의 전화에 시큰둥한 아들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내가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지금이야 쟤가 아직 어려서 너한테도 같이 주니어카페 가자고 하는 거지. 곧 인기짱이 될 텐데, 좀 있어봐라. 절대로 너한테 같이 놀자고 안 할걸? 네가 지금 포켓몬가오레나 할 때가 아니라고.' 속으로 답답해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아이돌들이 양현석 말을 꽤 잘 들었겠구나, 조금 뜻밖의 것들이 이해가 되곤 한다.


그런 아들이 얼마 전 태권도 캠프를 다녀와선, 나 말이야... 좋아하는 애 있는데...라고 말했다.

누군데? 누구?

짝사랑이야? 너 혼자 좋아해?

남편과 내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었다.

아들은 태권도장 밴드에 올라온 캠프 사진을 보며 어떤 여자애를 가리켰다.

얘야! 그리고, 엄마, 얘도 나를 좋아하는 거 같아.

왜지? 왜 그렇게 생각해?

거의 확실한데...

응응,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캠프 때 내 침낭을 발로 찼어.

침낭을 덮어준 것이 아니라 발로 찼다고?

어, 나 좋아하는 거 같아.


아......

늘 거실 티브이에 나는 솔로를 켜놓고 있었건만, 정말 아무도 보지 않았구나. 내 아들이 이럴 줄이야.

엄마는 아빠가 싫을 때면 아빠가 잠들었을 때 발로 차버린다는 비밀을 털어놓으며 "네가 싫어서 발로 찬 거 아닐까? 새침낭이라 더럽지도 않았을 텐테"라는 의견을 넌지시 제시해 보았지만 "에이, 엄마가 뭘 모르네."라는 말을 하며 개코도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한번 쓰윽 보더니 다시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들 표정이 하도 단호하여 그러게, 내가 개코도 모르는구나 싶어 쭈굴거리며 돌아섰지만, 침낭을 발로 차는 것이 좋아하는 건가?

하긴, 나도 혼자 남편을 좋아하던 시절에 나를 몰라주는 남편이 너무 재수 없어서 남편 차에서 내릴 때마다 차문이 부서져라 있는 힘껏 닫곤 했다. 초3이 벌써 그런 경지에 올랐을 리는 없는데, 어째서 침낭을 걷어차 버린 것이 '쟤도 나 좋아해'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야말로 나는 솔로를 좀 더 봐야 하는 가 보다.


"선생님이 연애 금지라고 했다며?" 슬쩍 묻자 "걔는 옆 학교야. 선생님은 그냥 우리 반에선 연애금지라고 했어" 라고 대답한다.

조사를 구별해서 쓸 줄 아는 걸 보니 다 큰 거 같기도 하고, 이 정도 분별력이라면 침낭을 발로 걷어 찬 것이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태권도장이 며칠 방학이었고 내일부터 아들은 다시 도장에 간다.

아무쪼록 아들이 불편하지 않은 연애에 성공하여 떡볶이를 냠냠 잘 먹길 바란다. 파이팅!!


+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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