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의 데이트와 함께 한 시간

오늘의 사연

by 날아라빌리

2005년도에 ‘두 시의 데이트’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자주 들었다.

재취업을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던 해였다.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고 하염없이 기다리던 날들이 이어졌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사막과 같은 공간으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 위로 광활함과 막막함이 교차하던 속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두 시의 데이트를 듣는 시간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반복되던 나의 하루와는 달리 전국에서 날아드는 사연은 시끌벅적 다채로웠다. 계절의 소리를 담고서 와글거리는 오늘의 사연을 들을 때면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사연 속의 뒷얘기를 상상하면서 사막 같은 적막의 시간을 걸을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다. 여름이었다. 점심으로 햄버거 가게에서 버거를 먹으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양상추가 씹히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아삭아삭.

한 남자가 문구점 아가씨에게 반했다는 사연을 보내왔다. 회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의 문구점 아가씨에게 반했다고 했다. 그 아가씨를 보기 위해 매일같이 문구점에 들러 샤프나 지우개 따위를 사고 있는데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 걸까요?라는 내용의 사연이었다. 사연 읽기를 마친 진행자가 침을 튀겨가며 조언을 시작했다. 남자의 설렘과 진행자의 흥분이 전파를 통해 나한테까지 전해져 와 내 어깨도 절로 들썩였다.

샤프나 지우개 같이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을 사봤자 눈에 띄지 않으니 연하장 같이 특이한 것들을 사라는 충고를 하며 진행자는 오후 두 시의 햇살 속에서 잔뜩 열을 올렸다. 한 여름의 연하장이라니! 너무나도 내 취향의 사연과 조언들이었다.

웃음을 참기 위해 입꼬리를 눌러가며 피식거렸지만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와버린 웃음에 양상추를 흘리고 말았다. 그 남자의 후일담을 기다리며 한동안 라디오를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챙겨 들었다. 내가 날려대고 있는 이력서에 대한 답만큼이나 그 남자의 후일담을 기다렸던 것 같다. 초조함과 간절함을 담아 기다리고 기다렸다.


문구점 아가씨에 대한 남자의 후일담은 내 이력서에 대한 답보다 빨리 날아왔다. 남자는 라디오 진행자의 말대로 연하장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구점 아가씨에게 “털실내화 있어요?”라고 물었다고 했다. 이야, 나름의 응용력이군! 감탄하며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남자의 두근거림과 긴장감에 잔뜩 몰입하고 있어 라디오를 듣는 내내 어깨를 움츠렸다. 드디어 돌아온 문구점 아가씨의 대답.

“연하장을 사라고 했잖아요. 매일 샤프 같은 것 사지 말고.”

“어? 방송 들었어요?”

“네.”

어머나! 이 얼마나 앙증맞은 전개란 말인가.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그만 “꺄아!” 소리 지르며 흥분하고 말았다. 성공이다! 만세! 그러나 계속 이어진 문구점 아가씨의 대답.

“근데요, 미안하지만 저 남자친구 있어요.”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 정도도 안 되나요?”

“그건 제 남자친구한테 너무 미안하잖아요.”

문구점 아가씨는 단호하고 정확했다. 결국 남자의 로맨스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2005년 여름에 추억을 만들어준 두 시의 데이트와 문구점 아가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며 사연을 끝내고 있었다. 진행자의 말대로 마치 단편영화 같은 사연이었다.


그 여름. 나는 점심으로 버거를 자주 먹었고 버거 속에서 씹히던 새우의 통통함과 양상추의 아삭함에 집중했었다.

‘털실내화요? 연하장을 사라고 했잖아요.’

‘어? 방송 들었어요?’

‘그럼요. 근데요, 사실 그쪽이 매일같이 샤프 살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어요. 오늘쯤엔 연하장을 사러 올 것 같아서 아침부터 내내 기다리고 있었는데……. 털실내화 필요해요?’

‘아니요, 그럼 털실내화도 연하장도 모두 주세요.’

이렇게 진행되었다면 좋았을 뻔했잖아? 나 혼자 상상하곤 했다.

내 이력서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었고 내가 기다리던 사연은 나의 상상과는 달랐지만 그럼에도 오후 두 시는 한없이 아름다웠다. 구름 한 조각에 어우러진 햇살 한 모금에 잠시나마 행복해지곤 했다. 혀끝에서 느껴지던 탱글탱글한 새우의 식감이 즐거웠다. 여름이 끝날 무렵엔 양상추를 흘리지 않은 채 아삭아삭, 씹을 수 있게 되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시간들이다.


얼마 후 이력서 날리기를 그만두었다. 난생처음 학원강사 일을 하게 되었고 후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는 동안 오후 2시의 햇살을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 시간을 다시 떠올렸던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 그때의 내가 얼렁뚱땅 엄마가 되었고 내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오후 2시쯤엔 어김없이 어린이집 밴드의 알람이 울렸고 아이들의 하루가 담긴 사진들이 올라왔다.

집을 이사하면서 친정어머니께 아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아이는 처음 보는 선생님과 낯선 친구들이 가득한 어린이집에서 가장 일찍 등원하여 가장 늦게 하원하는 아이가 되었다.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며 일어나는 순간부터 울기 시작했다. 고집스럽게 침대에 드러누워 “엄마, 가지 말고 코 자자. 옆에 누워서 코 자자.”하는 모습을 볼 때면 어느 날은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나고 또 어느 날은 마음이 급해져 화가 나기도 했다.

어린이집 문 안으로 어린 등을 떠밀고 돌아섰다가 멈칫 뒤를 보면 유리창을 통해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마주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하루 종일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날은 오후 두 시의 알람 소리에도 쉽사리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이의 표정을 이미 알 것도 같았다.


그날은 빨간색 원복을 입혀서 보냈는데 참새같이 귀여운 모습이라 두시가 되길 기다렸다. 너의 하루는 어땠을까? 너는 오늘 뭘 하며 하루를 보냈을까? 드디어 2시가 되어 알람이 울렸지만 2시의 사연 속에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활짝 웃는 얼굴로 기차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내 아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왜 없는 걸까. 온갖 상상을 동원하여도 답을 찾을 수 없던 오후가 겨우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가 아이의 알림장을 살펴보니 체육수업을 하기 싫어하여 혼자 떨어져 친구들을 바라보기만 했다는 메모가 있었다.

그 메모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버거가 먹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양상추를 흘리지 않고 잘 먹을 수 있을까. 문구점 아가씨를 좋아했던 아저씨는 잘 지내고 있을까.


마음을 다잡는 일이 항상 뜻대로 되진 않지만 아이의 사연 속에서 나는 결국 청취자일 뿐일 테다, 생각하고 생각하며, 흩어지는 마음들의 매듭을 고쳐 묶곤 했다. 아무리 귀를 기울인다 하여도 조금 열정적인 청취자일 뿐이고 사연은 오롯이 아이의 것이다. 사연에 담겨 있는 감정의 진폭을 나 홀로 가늠하며 그 속에서 흔들리는 일 같은 건 내 아이에겐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 기차놀이를 하지 않았느냐 물었더니 기차놀이가 무서웠다고 했다. 긴 스카프를 꺼내어 아이의 인형들을 다 매달아 놓고 함께 기차놀이를 했다.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거실을 뛰어다니니 아이가 신이 나서 웃었다.

“이것 봐. 기차놀이는 무섭지 않지? 친구들과 재밌게 할 수 있겠지?”

내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그저 내 눈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날 아이와 기차놀이를 하며 멀지 않은 날의 두시의 사연 속에서 아이가 신이 난 표정으로 뛰어다니길 기도했다.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기차놀이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 사연이 전해질 때까지 그저 담담하게 기다리자는 다짐을 반복하던 날들이었다. 내 응원이 아이에게 닿을 수 있기를 무심한 듯 간절하게 바랬다. 결국 그 응원이 나에 대한 응원과 다르지 않음을 그제야 깨달았고, 2005년의 사연에 대한 응원과 기다림 또한 오롯이 나를 위한 것임을 이해했다.


아직도 2시엔 알람이 울리고 있다. 어린이집 알람을 거쳐 유치원의 알람. 이제는 학급밴드의 알람이 울리고 있다. 어제의 사연을 살짝 늦은 오늘에서야 확인해 보니 줄넘기 준비물이 있었다. 챙겨주지 못했는데 아이는 줄넘기를 빌려서 했으려나. 이제 그 정도쯤은 알아서 할 정도로 자랐기에 큰 걱정은 없다.

오늘은 어떤 사연이 전해질까. 잊지 말고 들어야 할 텐데...... 조금은 태연해진 마음으로 2시를 떠올리다가 문득 '새우 버거가 먹고 싶구먼'이라고 중얼거리는, 살짝 느슨해지고 조금은 불량해진 나이 든 청취자가 여기 있다.


문구점 아가씨를 좋아했던 아저씨는 그 후 누구와 연애를 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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