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여름이 한 발씩, 한 발씩... 서서히 물러서고 있음이 느껴진다.
지난주는 유난히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아침은 온통 풀벌레 소리에 잠겨 있었다. 우리 집은 2층이라 풀벌레 소리가 제법 잘 들려온다. 이른 아침에 창을 열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나까지 그 속에 잠겨드는 것 같았다. 이슬 위로 미끄러지고 있는 풀벌레 소리에 젖어들면서 조금씩 몽롱해졌다. 주말이 다가오던 어느 아침엔 풀벌레 소리를 닮은 비도 내렸다.
이번 여름은 아주 맹렬하여 도무지 손 쓸 수가 없는 더위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틈엔가 그 열기가 서서히 옅어지고 있다. 이맘때쯤 늘 그랬듯 역시나 조금 아쉽고 이상하게 서운하다. 여름의 물러섬이 어째서 내 청춘처럼 느껴진 걸까.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가버린 청춘의 물러섬을 어쩌자고 매번 이맘때쯤에 다시금 느껴가며 아득해하고 있는 것인지.
한 여름 정오의 달아오른 태양 아래선 자주 들떴고 그 뜨거움이 투명하게 말랑해질 해질녘이면 분홍빛 노을 아래서 자주 설레었다. 열린 창 너머로 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눈빛에 느닷없어 했고 달려오는 발 끝에 매달린 맥박소리가 크게 울릴 때면 달뜬 숨을 내쉬기도 했다. 조금씩은 다른 온도를 지녔던 어느 여름날들이었다.
그 겹겹의 여름들과 풀벌레 소리에 잠긴 아침 사이를 서성이며 들숨을 마시고 날숨을 뱉어내던 중 여동생과 놀이터에서 줄넘기하던 때가 떠올랐다.
서른 살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던 어느 밤에 집 앞 놀이터에서 여동생과 줄넘기를 했다. 드류베리모어가 모델이었던 아이스크림 광고의 CM 송을 자주 듣던 때였다. 'This heart is a stone'이라는 제목의 노래였는데 놀이터에 내려앉은 밤공기 속으로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르 울려대었고 내 심장은 돌이라고 노래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너무 청아하여 여름의 그 밤과 제법 잘 어울렸다.
"왜 내 심장은 돌이라는 거지?"
"내 사랑은..., 깨지지..., 않는다..., 그런 뜻..., 아닐까?"
여동생은 줄넘기를 하면서 중간중간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동생은 결혼을 앞두고 있던 중이라 웨딩드레스 맵시를 위해 살을 좀 더 빼겠다며 밤마다 줄넘기를 했고, 나는 그 옆에서 하나, 둘, 셋, 넷... 하며 줄넘기 줄이 넘어가는 수를 세어주곤 했다.
동생은 어제보단 살이 좀 빠진 거 같은지를 매일 밤마다 물었다. 원래가 마른 몸이라 가뜩이나 변화를 눈치채기 힘들었는데 그걸 매일같이 물어오니 어쩔 수 없이 나의 대답도 늘 같았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물으면 나도 좀 창의적인 대답을 해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어제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어, 좀 빠진 거 같아. 근데, 너 원래 말라서 그렇게 많이 표시 나는 건 아니고 그냥 전체적으로 조금 가벼워진 느낌?"
"그 말은 어제도 했잖아. 그럼 어제에 비해서 변화가 없단 말이야?"
"어제도 말라 보였고, 오늘도 여전히 말라 보여."
"언니야, 자꾸 그렇게 성의 없이 대답할 거야?"
이 여름이 끝나면 평생을 함께 했던 여동생이 집을 떠나는 거였다. 더운 밤공기 속에서 줄넘기 줄을 세어주는 것도, 살 빠진 거 같냐고 매일같이 묻는 저 투정도, 이제 곧 끝나겠구나 싶었다. 나는 내 심장은 돌이라고 말했고, 동생은 내 사랑은 깨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나, 둘, 셋, 넷. 동생이 줄넘기를 하며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그 숫자를 세며 나를 뒤돌아보던 어떤 눈빛을 떠올렸다. 그 안에 있던 머뭇거림은 후회였을까, 미련이었을까. 동생과 나는 각자 다른 온도의 여름을 보내고 있었고 새로운 안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
돌아보니, 여름이었다.
고집스레 붙들고 있던 헛된 마음을 접을 때나 저물어가는 시절을 향한 안녕을 고하기에 적당한 때는 한 계절의 물러섬과 또 다른 계절의 다가섬 사이에 있을 때가 아닐까. 게다가 그게 여름이라면야. 제 아무리 시답잖은 사연과 하나마나 한 핑계를 늘어놓는다 해도 그 끝에 '여름이었다'를 붙여놓는 순간 수만 가지의 서사와 애틋함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이미 아득해져 가고 있지만 아직은 남아 있는 여름에 충실해야겠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이제는 안녕을 이야기할 때 너무 많은 후회가 남지 않도록, 겹겹의 여름들 위로 어떤 시간을 쌓아 올리며 사실 그땐 여름이었다고 말할 때 너무 아프지 않도록, 남은 여름을 성실하게 잘 채워야겠다.
#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