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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Jan 20. 2024

사실, 난 도리야


1월이 시작된 첫째 주 주말부터 수영강습을 시작했다. 당연히 받는 것이다.


보라카이에 다녀온 후 수영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온몸에 힘을 빼고 물살에 몸을 맡긴 채 둥둥 떠다니며 하늘을 바라보던 시간이 많았다. 빛이 물 표면에 부딪혀 아주 잘게 조각나며 튀어 올랐다가 다시 물 위로 흩뿌려지며 반짝였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무언가에 홀린 듯 잔뜩 멍해져 빛이 찰방찰방 소리 내고 있는 것인지 물이 촤르르르 빛을 내고 있는 것인지 알기 힘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 불쑥, 어쩌면 물 안에서 꽤 오래 숨을 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의욕이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한 호흡 크게 들이마신 후 물 안으로 풍덩 뛰어들었고 그 파아란 무중력을 잠시나마 느끼곤 했다. 그 모든 순간순간들 속에서 느꼈던 감각들이 정말이지 새롭고 신비로웠다.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체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평상시 느껴보지 못한 자유와 해방감이었다.

"사실 난 니모 친구 도리야. 디즈니가 놓친 것이 있지. 도리는 가끔 사람이 된다는 사실 말이야. 물론 기억력이 나빠서 나도 내가 도리인 걸 잠시 잊고 있었어."

그래, 뭐, 헛소리다. 그치만, 물에 한참이나 둥둥 떠 있다 보면 저절로 그런 소리가 나온다. 아니,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내가 도리가 아니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물살을 가르는 동안 행복하다, 신난다, 이토록 멋진 걸 그동안 왜 몰랐을까, 중얼거렸다. 여태껏 한 번도 수영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을 한탄했다. 내가 다~~ 아 아는데(응?) 물을 몰랐던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땅, 물, 불, 바람, 마음, 다섯 가지 힘을 하나로 모아 지구를 지키던 캡틴플래닛의 마음가짐으로 물 위에 그냥 둥둥 뜨는 거 말고, 물 안을 제대로 들여다보며 니모랑 나란히 헤엄쳐보자,라는 다짐을 했다............ 는 건, 그냥 아무 말 대잔치 중에 일단 던져보는 소리다. 차~아~ㅁ내, 내가 도리다. 마흔 살이 넘어 뒤늦게 깨달은 정체성이니 지금이라고 수영을 배우겠다는 건데 뭐. 그래도 굳이 다른 이유를 찾아보자면, 수영복이 맘에 들었달까?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을 평생 처음 시도해 보는 차림새로 경험하자 그 모든 순간들이 너무, 너무, 너무, 좀 말이 안 된다 싶을 정도로 신기하고 재밌었다. 이거 또 하고 싶은데? 다음에도 또 입어 보고 싶어. 알록달록한 수영복을 입고 더 깊이 들어가서 친구들이랑(내 친구가 바로 그 유명한 니모다) 헤엄쳐야지.


2023년이 끝나갈 무렵 2024년을 위해 가장 먼저 준비했던 것은 수영강습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집 바로 옆에 시에서 운영하는 체육센터가 있긴 했지만 수강신청이 꽤나 힘들어 보였다. 수강신청 페이지가 열리자마자 클릭해야 한다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늘 한 두어 박자 늦기에 그런 건 애초에 시도하지 않는 편이다. 선착순 앞에선 일단 머뭇거린다.

이런 일을 앞에 두고 아자아자아자, 귀여운 기합을 넣으며 주먹 꼭 쥔 채 "좋았어. 승부닷!"라고 중얼거리는 명랑만화 주인공이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그러지 않는다. 기 빨리는 건 최대한 피하고 본다. 어차피 수강신청에 성공한다 해도 말로만 듣던 기존 회원 텃새를(?) 실제로 겪게 된다면...... 이제야 겨우 깨달은 나의 정체성을 다시 포기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홈페이지를 조금 둘러보다가 수강신청 화면에서 연이어 와르르 뜨는 팝업창들과 붉고 짙고 커다란 글씨로(게다가 궁서체다) 강조해 놓은 수강신청 날짜에 제대로 기가 눌려버렸다. 재빨리 화면을 닫아버리곤 숨고 어플을 깔아 수영강습 견적을 요청했다.


수강대상: 가족 3명(성인 남녀, 초등학생 남아)

수강요일: 주말

수강장소: 고수가 있는 수영장으로 갈게요

  

몇 개의 견적이 도착했고 생각보단 비싸지 않은 수강료에 마음을 굳혔다.

강사님께서 자유형은 8회 정도면 배울 수 있다고 하여 일단 8회분을 수강했다. 사실 8회 만에 자유형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난 도리니까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럭저럭 자유형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다음엔 프리다이빙 자격증 코스를 수강할 계획이다. 그때쯤엔 날이 조금씩 따뜻해져 바다로 가기 딱 좋을 계절이 되어 있을 테니.


우선은 수린이답게 까만 수영복을 준비했다. 사실 난 오로라처럼 빛깔이 다채로운 수영복을 입고 싶은데, 수영 후기를 보니 처음에는 어두운 색 수영복으로 시작했다가 실력이 늘수록 조금씩 알록달록하고 밝은 색상으로 변해간다고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들 그러는 거 같았다. 한 4주 차쯤엔 나도 밝은 수영복을 입을 수 있으려나.

마음은 이미 바다마녀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헤엄치는 꾸러기가 되어 있다. 가끔 뒤돌아보며 잔뜩 약을 올리는 표정도 지어 보이고 "어디 한번 나를 잡아보시지!!" 이런 말도 중얼거린다. 난 제법 짓궂고 맹랑한 구석이 있는 도리님이시다.

4주 후엔 꼭 이 도리님께 어울리는 수영복을 입고 말 테다.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결심해 본다. 후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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