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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Sep 01. 2024

스앵님, 저는 판다였나요?

지난겨울 가족들과 함께 수영강습을 받았다. 숨고 어플을 통해 수영을 가르쳐줄 강사님을 찾아 개인강습이 가능한 수영장(보통의 수영장은 개인강습을 받지 못하며 수영장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수강해야 한다)으로 찾아가서 수영을 배웠다. 8회 정도면 자유형은 할 수 있다 하셨는데 과연 말씀하신 대로였다. 겨울 동안 토요일 오전을 물에 잠겨서 보낸 덕에 자유형과 배영은 그럭저럭(잘 X) 할 수 있게 되었다. 강사님께서 손동작 하나하나, 발 끝의 세세한 모양까지 알려주셔서 단기간에 배운 것치곤 그럭저럭(잘 X) 앞으로 나아가며 헤엄치게 되었다. 회차가 더해졌다면 자세와 호흡법을 좀 더 다듬었을 테고 평영까지도 제대로 배웠을 텐데 아쉽게도 거기까진 하지 못 한 채 수업이 끝나버렸다. 평영의 손동작과 발차기를 잠시 배우긴 했지만 그건 그저 배우기만 해서 되는 영법은 아닌 것인지 내내 팔다리가 따로 놀았으며 팔다리 동작을 합체(?)시킬 때마다 물속에서 균형을 잃은 채 허우적거렸고 물을 잔뜩 먹어 배가 차올랐다.

"선생님, 이러다가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데요?"라고 하소연해봤지만 "죽진 않습니다~"라는 대답만 돌아왔으며 마지막 시간엔 물만 계속 먹다가 수업이 끝나버렸다.


남편과 아들은 주말마다 수영을 배우는 것이 힘들었는지 8회 차 수업이 끝나는 날 꽤나 기뻐했는데, 나는 평영을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데 이대로 끝나버려 많이 아쉬웠다. 슬슬 자세에 대한 욕심이 나던 중이었다. 허우적대는 거 말고 그 뭐냐 팔꺽기, 그거 하면서 자유형 할 때 멋짐 뿜뿜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개인 강습을 계속하기엔 강습 비용과 수영장까지의 거리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강사님의 강습력과 맞바꾼 수질도 점점 견디기 힘든 중이었다. 물 안에서 시야라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로 헤엄을 치니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가 있나. 수강신청이라는 거대한 허들과 기존 회원의 텃새에 대한 두려움(?)으로 개인 강습을 택했던 것인데, 하는 수 없이 다시 원점. 집 근처에 있는 국민체육센터의 홈페이지를 살펴보기 시작했고 수강 신청이 시작되는 날 새벽에 일어나 단호하고 재빠른 클릭질로 마침내 수강신청에 성공하고 만다.


일주일에 한 번 하던 수영을 매일 아침마다 하게 되자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아졌다. 수영가방, 수영 전용 샴푸 및 전용 세안제, 머리 고무줄, 자그마한 샤워볼 등등 수영인들의 '왓츠인마이백'을 검색하면서 본격적인 용품들을 챙겨야 했다. 게다가 새벽수영 후 바로 출근해야 했기에 물귀신 같은 꼴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도 필요했다. 휴대용 드라이어와 고대기를 구입했고 평소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아 들고 다니지 않던 화장품 파우치도 챙기기 시작했다.


아! 그러니까 처음엔 내 꼴이 물귀신 같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꼴이 너무 후지면 출근한 후 화장실에서라도 좀 찍어발라야지'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문제는 물귀신이라기보단(스아-실 원래 꼴이 귀신같긴 해서 물귀신정도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에 불은 판다 같았다는 거에 있었다.

이마를 가로지르고 있는 선명한 수모자국과 눈에 도장이라도 찍은 듯 타원형으로 난 동그라미 자국 두 개.

얘네들은 쉽사리 없어지지도 않았고 화장품이나 머리카락으로 가려지지도 않았다.


수영 첫날. 출근 후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서 외모췍을 하다가 이마를 반띵하고 있는 정체 모를 라인과 시뻘건 눈도장 두 개에 깜짝 놀라고 만다. '헙! 스벌! 이게 뭐야?'

사실 주말마다 수영을 할 때도 수영이 끝난 후 거울을 보면서 "어머!" 하며 놀라긴 했었다. 그렇지만 그땐 수영 후 출근이 아니라 수영 후 귀가였기에 내 꼴에 대해선 개의치 않았는데, 수영 후 출근이 이어지자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수모자국과 눈가의 동그라미 자국이 아주 다급하고 중대한 문제로 대두되고 만다. 1시간가량 되는 출근길에도 그들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그 기세가 쉽게 꺾일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오전 내내 그들을 훈장처럼 달고 다녀야 했는데 가끔은 점심시간이 지날 때까지 그 자국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고개를 푹 처박고 밥을 먹어야 했다.

한 10여 년 전에 보아가 '아틀란티스의 소녀'라는 노래를 부르며 태초의 꿈을 간직한 인디언 소녀같이 이마에 띠를 두르기도 하고 고글을 쓰기도 했는데 혹여 나도 그리 보이진 않을까, 하는 기대를 살며시 품어보기도 했지만, 누가 보아도 탄력이 부족한 피부에 찍혀버린 정체 모를 자국...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모까진 몰라도 수경까진 눈치챌 수 있겠지만 (서로에게 아주 다행스럽게도) 별로 자세히 안 들여다보고 싶은 어떤 자국... 일뿐이었다.


내 꿈은 도리였다. 니모 친구 도리가 되고 싶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어쩌면 내가 도리는 아닐까, 생각한다. 바다마녀에게 "나 잡아봐라~~ 용용 죽겠지?" 하며 산호 사이를 요리죠리 피해 다니다가 잠시 기억을 잃은 귀여운 도리, 그게 바로 나야. 그런 상상을 하며 야심 차게 시작한 수영인데 난데없이 판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판다 안 되는 수경'을 검색하여 추천해 주는 수경을 하나하나 도장 깨기 하듯 구매하고 있는 중이지만, 오늘도 나는 판다다. 여전히 나는 그저 판다다. 아마 내일의 나도 판다일 것이다. 그 후기들이 죄다 거짓부렁임을(대분노!!!) 하나하나 도장 깨기 하듯 내가 몸소 체험 중이다. 젠장.


+ 어쩌면 이것은 내 피부의 탄력과 관련된 문제일 테니 글쓰기의 카테고리를 잘못 선택한 걸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 피부의 구린 탄력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 수모자국과 수경 자국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을 곳도 딱히 없으니 어쩔 수가 없구먼.

수영복은 두 개뿐인데 수경만 벌써 5개 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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