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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Nov 03. 2024

도리지만 수영복이 갖고 싶어

나는 아침마다 도리가 된다.


기상 시간은 5시 20분이다. 알람은 5시부터 울리지만 잠과의 격렬한 전투를 치르느라 알람소리를 듣자마자 일어나는 것이 좀 곤란하다. 잠이란 녀석은 여간 끈질긴 놈이 아니라서 어제 새벽 그렇게 쥐어팼는데도 오늘 새벽이면 다시 팔팔해져 있다. 어휴, 진짜 지긋지긋하다. 녀석과 꽤나 격전을 치른 후 간신히 일어난 시간은 5시 20분. 일단 일어난 후부턴 모든 동작들이 빠르게 이어진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한 후 주섬주섬 옷을 껴입고 운전을 해서 수영장으로 간다. 다행히 수영장은 집 근처라 5시 40분쯤엔 나는 이미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며 수영복을 갈아입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다. 그리고, 나의 비밀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 이미 몇 차례 말 했지만 나는 아침마다 도리가 되는데...


일단 주위를 좀 살펴야겠다. 누가 들으면 조금 곤란하긴 하다. 살짝 소곤거릴 테니 귀를 쫑긋하시길.

내겐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는데 이것은 흡사 신데렐라의 마법과도 비슷한 것으로 실은 나도 아직 좀 얼떨떨하다. 내게 진짜로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좀 헷갈리는데, 어느 날 샤워를 하는 중에  유난히 배와 가슴 부위가 가려웠다. 그러고 보니 며칠 째 그랬던 것 같아 슬며시 만져보니 손끝에 닿는 피부의 감촉이 낯설었다. 이게 뭐야? 깜짝 놀라 살펴보니 비늘이었다. 악! 비늘이라니! 맙소사, 내가 진짜로 도리였나? 남들은 알지 못하는 푸른 비늘이 피부 위로 돋아나 내 몸을 살며시 덮기 시작했다.

어? 아니, 아니. 시장이나 마트에서 볼 수 있는 생선 비늘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비늘은 아주 부드럽고 얇으며 몸에 착착 감겨들어 은은하고 고급스럽게 반짝인다. 그 비늘은 내가 수영하는 동안 물살을 가르는 움직임에 따라 빛이 굴절되는 각도를 달리하며 무지개를 뿜어내다가 수영이 끝나고 다시 샤워실로 돌아올 때쯤엔 사라지곤 했는데........ 는, 사실 뻥이다. 세상에나, 이게 뻥이라서 좀 슬프다.


나는 아침마다 도리가 되는데 왜 비늘이 생기지 않는 걸까. 언제쯤이면 비늘이 생길까.

내게 비늘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우 공을 들여가며 침울해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수영복 때문이다.

르망고 수영복. 쓸데없이 너무 이쁘잖아 ㅠㅠ

자주 가는 쇼핑몰에서 이 수영복을 발견했는데 처음엔 저 수영복에 붙어 있는 반짝이가 좀 촌스러웠다. 인위적으로 붙여 놓은 퍼어런 반짝이 때문에 이건 마치... 트로트 가수 무대의상 같은데? 하며 진짜 처음엔 보자마자 사정없이 비웃었다. 근데, 보면 볼수록 저 푸른 반짝이가 그림 같은 비늘로 보여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 백 년 살 수 있는... 아, 이건 아니고. 암튼, 그날부터 내내 저 푸르른 반짝이 수영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올 4월에 새벽수영을 시작한 후 총 3벌의 수영복을 갖게 되었다. 까만색 수영복 하나, 분홍과 파랑이 뒤섞인 수영복 하나, 꽃무늬가 그려진 수영복 하나. 그중 검정과 분홍이만 자주 입는다. 꽃무늬는 타이백 타입이라 입을 때 불편하며 수영을 할 때도 끈이 풀릴까 조금 걱정되어 주말에 자유수영을 할 때만 입고 있다.


어제도 나는 자수(자유수영)를 위해 꽃무늬 타이백 수영복을 챙겨서 수영장에 갔다. 지난번 글에서 수영을 할 땐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썼는데, 실은 그것도 뻥이었나 보다. 어제는 수영을 하는 내내 그 반짝이 수영복을 생각했다.

요즘 글라이딩에 욕심을 내고 있는 중이라 팔을 쭉쭉 사정없이 뻗고 있는데 그 방향과 힘의 균형을 찾지 못하여 물안에서 계속 비틀대고 있다. 일자로 나아가지 못하고 조금씩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1시간이 넘도록 자유형만 묵묵히 연습했음에도 지난주보다 더 우왕좌왕하는 것 같아 슬슬 화딱지가 났다.


아, 젠장. 나는 도리가 아니었나? 도리라면 이럴 리가 없는데.

나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내가 도리가 아니라면 푸른 비늘도 영영 안 생기려나. 그럼 이 참에 그냥 그 퍼랭이 수영복이나 사버릴까.

그 틈으로 쓸데없는 물욕이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타이백 수영복의 끈은 자꾸만 등을 간지럽히고 있어 이것 때문에 수영이 더 안 되는 걸까.

아뿔싸. 핑계 하나가 더 추가되었고.

수영이든 뭐든 취미 생활은 결국 장비빨이라지만, 나는 진짜로 도리라서 더 이상의 수영복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내내 자유형을 이렇게까지 지그재그로 하고 있으니 그냥 쟤를 사버릴까?


그렇게 두어 시간을 묵묵히, 마치 수행이라도 하는 마음가짐으로 디립따, 자유형만 내리 했으나 머릿속으론 오만가지 잡생각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


(아직은?) 도리지만 수영복이 갖고 싶어.

사실 이것도 갖고 싶고요.... 실은 뭐 더 많고요...말해 뭐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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