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특별한 하루

by 날아라빌리

새벽에 잠이 깨었다. 시계를 보니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어제, '나 혼자 산다'의 기안 84편을(미술에 대한 고민이 많아 보였는데, 그 분야는 잘 모르지만 그의 고민은 꽤 공감되었다) 다 보고 잠들었으니 실은 어제가 아니라, 오늘 새벽에 잠들었다가 깬 것이었다.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으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쿵쿵쿵쿵. 언젠가의 밤처럼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진료를 받을 때면 의사 선생님은 항상 잠은 잘 자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하신다. 선생님께는 그렇다고 대답했으나, 사실 아주 그렇지는 않고 대체로 잘 자는 편이지만 가끔 약 먹는 걸 잊었을 때는 이렇게 새벽에 깨곤 한다. 어제는 약 먹는 걸 잊었다기보단 금요일이니 기분을 좀 내고 싶어 맥주를 마셔버렸고 맥주 때문에 약을 먹지 못했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술과 약을 같이 복용하지 마란 말씀을 하진 않았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맥주를 조금이라도 마신 날엔 약을 먹지 않는다.)

어제 약을 안 먹어서 또 이렇게 깨버린 걸까. 쿵쿵쿵쿵. 소리가 자꾸만 빨라지고 있어 옆에서 자고 있는 아들의 심장 위로 손을 대었다. 콩닥콩닥. 아들은 여전히 아기 때처럼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작고 귀여운 울림에 집중하려 했으나 어디선가 계속 쿵쿵쿵쿵- 거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선생님, 이건 상상일까요? 사실 심장박동은 멀쩡한데 그냥 제가 그렇게 상상하며 감각하는 걸까요?"

똑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했었다. 분명히 숨이 막혔는데 죽지 않았으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상상인가 싶기도 했던 것이다.

"상상임신처럼요?" 선생님 역시 같은 대답을 하며 웃었다.

상상은 아니예요. 상상만으로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아요. 그냥...... 그러다가 언젠가는 같은 상황에서도 심장이 빨리 뛰지 않는 날이 올 거예요. 어? 괜찮네? 하는 경험이 쌓이다 보면 더 이상 불안해지지 않아서 심장이 빨리 뛰지 않게 될 거예요,라고 하셨다.


잠에서 깨자마자 쿵쿵쿵쿵 빨라지는 이 소리는, 대체 어떤 불안에서 기인한 걸까. 나는 지금 아주 평온한 상태인데 도대체 뭐가 불안한 걸까. 그저, 언젠가의 밤처럼 숨이 덜컥 막혀버려 혼자 거실에서 엉엉 울었던 그 기억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걸까? 한번 숨이 막혔던 경험이, 다시 숨이 막히면 어쩌지? 하는 불안으로 이어져, 그 불안은 나의 교감신경을 과하게 활성화시켜 심박수를 증가시키고, 결국 다시금 숨이 막혀버리게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는 걸까. 이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방법이 대체 뭐람. 아이고, 어렵네. 이거, 어쩌면 쉽게 끝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네,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막 약을 먹기 시작했을 때 '구의 증명'이라는 책을 읽다가 과호흡이 왔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이것은 상징적인 장치인가, 실제의 상황인가. 읽다 보니 심장이 너무 아팠다. 상상이 아니고 실체의 감각으로 심장이 쪼여왔다. 이건 사랑이겠지.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정의 내려야 한다. 그런데 진짜 이런 사랑이 있나. 이게 사랑이라면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사랑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데, 이게 뭐지? 내내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진짜로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 책을 읽는 동안 남편한테 자주 물었다.

내가 먼저 죽으면 너는 어떻게 살래.

네가 먼저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지.

그리고 그날 새벽에도 잠이 깨버렸고, 나는 가만히 남편의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쿵-쾅 쿵-쾅.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울림에 안심했더랬다.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나는 지금 뭘 불안해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불안의 정체를 알 길이 없어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아이고, 너는 참 요상한 아이로구나. 자꾸 이러면 피곤해서 어찌 사니."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선생님께서 그럴 땐 그냥 약을 먹으라고 하셨다. 알약 몇 개를 입안에 집어넣고 가만히 앉아 우짜이 호흡(요가의 한 호흡법)을 했다. 그러다, 다짐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난 김에, 약을 먹었으니 어쩌면 다시 잠들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런 파랗고 까만 새벽을 만난 김에 오늘을 아주 특별한 하루로 만들어야겠다는, 그런 다짐.


나의 온라인 요가 선생님, 에일린 님께서 며칠 전 어느 수련 영상의 끝무렵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오늘은 다시는 오지 않을 특별한 하루가 될 거예요.

어제와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오늘은 특별할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기로 선택했기 때문이에요."


가능한가요, 스앵님? 정말 그런 선택이 가능할까요?

머뭇거려졌지만, 요즘의 나에겐 의사 선생님과 요가 선생님의 말씀은 절대적이니 믿어보기로 한다.

정말이지, 오늘은 아주 특별한 하루가 될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들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 우선은 다시 누워야겠다. 슬슬 졸린다. 아들의 새근새근 숨소리와 남편의 쿵-쾅 쿵-쾅하는 울림에 귀를 기울이다가 평안하게 잠들어야지. 특별한 하루에 대해서는 아침에 생각해 보아야겠다.



아침이 되었다. 9시가 다 되어간다며 남편이 계속 깨워서 조금 투덜거렸다.

"나 어제 숨이 안 쉬어져서 새벽에 깼다가 약 먹고 다시 잠들었어. 30분만 더 자게 내버려 둘래?"

남편이 깜짝 놀라 그래, 그래, 하며 이불을 덮어줬다. 숨이 안 쉬어졌다는 건 살짝 뻥이었지만 더 자고 싶어서 그냥 뻥 좀 치기로 했다. 일어나선 바로 출근을 했다. 다음 주 수요일엔 발리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밀린 일이나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없는지 살펴봐야 했다. 게다가, 화요일엔 강의가 있어 강의 자료 수정도 좀 해야 한다.

이전 근무지에서 했던 일이 제법 전문적인 일이어서 한동안 강의 요청을 꽤 받았지만 대부분 거절했다.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혼자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어려운 내용이라 내가 하는 말들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는데 그 순간의 싸늘한 분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게다가 시선처리를 어떻게 해야 능숙해 보일지, 그런 것들이 고민되었던 것이다.

그때는 절대 해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이, 이상하게 지금에서야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이번엔 강의 요청을 수락했다. 무슨 확신인진 모르겠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해야지 라는 부담 없이, 그냥 내가 아는 내용을 후배들에게 업무 인수인계하듯 편안하게 설명하면 되지 않을까. 지난주 첫 강의 때 약을 두 첩이나 챙겨 먹고 강의를 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 내가 너무 어렵게 익힌 것들을 후배들은 쉽게 익혀서 큰 어려움 없이 해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착한 아이들이라 강의가 끝난 후 너무 좋았다, 잘 알아들었다,라고 말해줘서 정말 기뻤다. 다음 주엔 더 열심히 준비해서 제대로 알려줘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강의 자료를 보충하는 중.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네 싶겠지만, 점점 그쪽으로 기울고 있다. 확실히, 사람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무질서하며 한없이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쩌면, 지혜란 남들보다 노력하지 않고 더 가질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이며 인내란 누군가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숨 죽이고 있다가 그의 노력에 편승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그러하기에 이제 와서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실망할 필요도 없다고, 아마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는 체념과 함께 성악설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나의 노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 나의 작은 호의가 누군가에게 큰 기쁨이 되었을 때 너무너무 행복한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악할 지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마도 제법 악해진 내가, 오늘도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악의 지뢰를 피해 가며 그럼에도 아직은 크게 악하지 않은 세상인 듯, 너도 나도, 우리 역시 아직은 완전한 악당은 아닌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한다. 그러한 순간 속에 담긴 진심과 거짓에 대해 늘 고민한다. 얼마만큼의 진심이 담겨 있을까. 오늘도 온통 거짓이었까. 그것이 거짓이라면 그런 모양의 거짓은 옳지 않고, 그저 진심만이 옳은 걸까?


고작 강의 자료를 만들면서 또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저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자료를 수정하며 최대한 쉽게 설명할 방법을 고민할 뿐인데, 어째서 성악설까지 들먹이며 진심이냐 거짓이냐를 따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혹여 그 마음속엔 그저 칭찬받고 싶은 나, 잘난 척하고 싶은 나, 친절한 척하고 싶은 내가 있는 건 아닌지, 그 모든 가식 속에 둘러싸인 나를 들킬까 봐 불안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 쫌! 정신 차리고, 그만 좀 씨부려.(그렇다, 비속어다. 스스로한테 쓰는 말이데 뭐 어때) 제발 일이나 좀 해라." 넌덜머리 난다는 듯 뒤통수 한 대 힘껏 치고 싶다.

어쨌든 이 모든 순간 속의 내가 '나'를 이루고 있다.

이 모든 순간 속의 호흡들이 나를 살아가게 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나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나도, 저런 나도, 괴팍한 나도, 요상한 나도, 가식적인 나도, 착한 척하는 나도, 욱하는 나도, 재수 없는 나도, 그 모두가 나라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려 한다. 성악설을 믿는다면서 좋은 사람인척 하려는 스스로가 좀 재수 없긴 하지만, 오늘은 괜찮다. 특별한 날이니까.



집에 가선 발리 여행을 위해 캐리어를 꺼냈다. 수요일 출발인데 이제야 짐 싸기를 시작한다. 수영복은 어제 직진배송으로 주문했다. 길리에선 자전거를 타고 다닐 예정이라 휴대폰 거치대가 필요한데 급하게 테무로 주문했더니 내가 출발하기 전에 도착할지 의문이다. 예전의 나라면 한두 달 전부터 준비를 하느라 야단법석이었을 텐데 이번에는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조용하고 느릿하게 진행되고 있다. 가족여행이 아니니 변수가 훨씬 없을 거라는 판단으로 준비가 덜한 것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아직 숙소 예약조차 완료하지 않은 것은 이전의 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트래블로그에 환전해 놓았고, 왓츠앱과 그랩을 깔았고, 파파고가 있으니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나답지 않다. 내게 이런 느긋함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 이건 일종의 무기력인가, 싶을 정도인데 우붓에서의 요가원 스케줄을 매일같이 확인하는 걸 보면 무기력은 아니다. 나는 이번 여행에 거는 기대가 꽤나 크기 때문에 무기력과는 조금 다른 감정인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라 이게 무언 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맹세코, 단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무어든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들이치는 상황을 너무 무서워하는데 지금의 나는 빈 캐리어를 앞에 두고 왜 이리 천하태평인지 모르겠다. 아, 항공권 출력을 했던가. 비자도 뭐 미리 해야 하는 거 같던데... 아 모르겠고, 내일의 내가 하겠지. 이러고 있는 중이다. 내일의 내가 해야 할 일이 꽤 많을 것 같아 오늘의 나는 미리 무릎부터 꿇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그냥 요가를 하기로 했다. 느긋한 호흡으로 인요가를 할 생각이다. 해야 할 일들을 적당히 마쳤고 편안한 마음으로 요가를 할 수 있어 감사하고 특별한 하루다. 내가 선택한, 아주 아주 특별한,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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