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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Dec 01. 2022

비상 깜빡이가 만든 마법

도로 위의 첫사랑

나는 3년째 초보운전이고 곧 4년 차가 될 예정이다.

딱 3년 전 이맘때 도로주행에서 2번을 떨어지고 3번째에 겨우 붙었다. 아련했던 그대. 윤지후 슨배는 하얀 천이랑 바람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 했으나 나는 하얀 천이 아니라 그런가. 갈 수 있는 곳은 여전히 직장뿐이다. 남편이 연습시켜준 길(직장-집)외엔 갈 수가 없다. 직장이 바뀌게 되면 남편이 또 연습시켜줘야 한다.


차가 있지만 운전을 못 해서 마트에서는 손에 들고 올 수 있는 만큼만 사는데, 양손 가득 이고지고 끙끙대며 오는 내 모습이 많이 한심하고 미련해 보이는지 남편은 도대체 왜 집 근처 마트조차 못 가느냐 한다.


휴우......

내게도 말 못 할 사연이 있다. 몇 년 전 첫사랑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여행을 가다가 사고가 크게 났다. 깨어나니 병원이었고 부러진 다리를 절룩거리며 첫사랑이 있는 병실로 갔지만 그 사람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누구냐 묻던 텅 빈 눈동자를 향해 내가 누구라고 말해야 할지 나조차도 알 수 없어 머뭇거려야 했다. 이상하게도 첫사랑의 기억 속엔 나만 없었고 내 자리라고 생각했던 곳엔 어린 시절부터 그와 함께 했던 소꿉친구가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사랑했던 한 시절이 끝나가고 있구나,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차를 타지 못 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난 후에야 겨우 누군가의 옆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게 되었는데....... 는 사실 뻥이고... (휴우...), 그 정도의 트라우마는 있어야 내가 아직도 운전대만 잡으면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납득이 되는데 안타깝게도 내게는 차에 얽힌 아무런 사연이 없다.


"도대체 왜 그렇게 운전을 못 해? 어쩌면 그렇게까지 못 해?"라고 남편이 내게 물으면 나도 할 말이 없다. 낸들 아니, 이 사람아?

3년째. 그리고 곧 4년째 초보 운전이 예정된 나야말로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하다. 이제라도 애틋한 사연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서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지요' 하는 눈빛을 운전대 위로 떨어트리며 떨고 있는 손을 남몰래 감추고 싶다.


내가 상상만 해도 두려워하는 상황은 구급차나 119가 사이렌을 울리며 뒤에서 다가와도 내가 비켜주지 못하는 것이다. 홍해 갈라지듯 도로 위의 차들이 옆으로 비켜서서 구급차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내 운전 실력으로는 도로를 막아버리거나 나름대론 비키기 위한 시도를 하려다가 도리어 구급차가 나서야 할 위급상황을 하나 더 추가해버리고 말 것 같다. 제발 향후 몇 년간은 내가 운전할 때 내 차 근처로는 구급차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비나이다, 비나이다)

 

암튼, 나는 초보운전이다. 게다가 차종은 도로 위의 최약체 베이지색 모닝이다. 당연히 초보임을 알리는 스티커도 붙이고 있다. 덕분에(?) 온갖 차들이 내 앞으로 끼어든다.

뉘에 뉘에~ 안녕히들 가세요. 얼마든지 먼저들 가세요.

언제나 느긋한 맘이지만 깜빡이도 안 켜도 끼어드는 차들은 내 실력으론 피하기가 힘들 때가 많다. 깜빡이만 켜면 나는 무조건 다 끼워주는데 왜 예고도 없이 들어오는 걸까.

특히 택시 기사님이나 피자 모양의 마크와 오륜기처럼 생긴 마크의 차들은 내 차가 아예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굴곤 한다. 그럴 때면 사고로 나를 잊어버린 상상 속의 내 첫사랑, 나를 이런 트라우마 속에 혼자 남겨두고 떠나버린 그 남자가 많이 밉다. 이게 다 너때문이다, 인간아!


이렇듯 옛 상처를 간직한 채  무시만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내게도 며칠 전 가슴 설레는 일이 있었다. 비가 내리는 퇴근길이었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운전길이라 더욱더 조심하며 모든 차들을 다 끼워주면서 터널 입구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하얀색 티볼리가 옆 차선에서 좌측 깜빡이를 켜는 것이다. 

우와, 나한테 깜빡이를 켜다니!

 순간  티볼리가 지후 슨배의 하얀 요트 같아 보였다.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지후 슨배의 요트를, 아니 티볼리를 끼워줬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비상 깜빡이가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끼워줘서 고맙다반짝임이었다.


차선을 바꾸기 위해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가 겨우 끼어들 때면 뒤차에게 너무 고마워서 넙죽 절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비상 깜빡이를 켜곤 했다. 그렇게 예의바른(?) 나지만 나를 향한 비상 깜빡이는 여태 단 한번도 없었는데 지후 슨배의 요트는 비상 깜빡이를 아주 오랫동안 깜빡였던 것이다.


하얀 요트는, 아니 티볼리는 누굴까.

아...... 혹시..... 너니?

너...... 이제야 내가 기억이 난 걸까.  

안돼, 이미 내게는 오랜 상처를 보듬어 준 남자가 있어. 그 사람은 내가 다시 보조석에 앉을 수 있게 해줬고 구박은 너무 많이 하지만 운전대까지 잡을 수 있게 도와줬어. 이제 와서 내게 이러지 마. 힝.

기억상실증으로 나를 잊은 상상 속의 첫사랑까지 동원할 정도로 티볼리의 비상 깜빡이는 감동이었다.


자자, 그러니 다들 베이지색 모닝을 너무 무시하지 맙시다. 그대들이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첫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깜빡이 정도는 켜주고 들어오자고요. 그대들의 첫사랑은 아직도 사고 후유증이 있어 심약합니다. 깜빡이 안 켜고 들어오면 바들바들 떤답니다?

차선 바꾸고 나면 비상 깜빡이도 켜줍시다.

잘 지내니? 나도 잘 지내. 또 이렇게 우연히 만나자. 행복해야 해, 하는 심정으로 깜빡이를 켜주면서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자고요.


이상! 난생처음 받아본 비깜이 거의 프러포즈 같이 느껴져 며칠 동안 몹시 설레었던 베이지색 모닝의 진지한 잡담이다. 하얀천이랑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그날까지, 베이지색 모닝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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