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이 나타났다

엄마가 오는 소리

by 날아라빌리

퇴근 후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현관문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숨 죽인다.

TV 소리가 들릴 때도 있고 아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릴 때도 있지만 오늘은 대체로 조용하다. 이 정도로는 내가 들어가기에 적당한 때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하는 수 없이 도어록의 키를 천천히 누른다.

삑-삑-삑-삑!

소란스러움이 시작되는 것은 이때부터다. 후다다닥- 아들의 발자국 소리가 부산스러워지며 우왕좌왕하는 것이 느껴진다. 급습하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공들여 번호키를 누르고 "엄마 왔다!" 하며 나의 등장에 대해서도 쩌렁쩌렁 알리지만 상대는 매번 급습당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한다.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연출된 장면은 늘 엉성하다.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핸드폰 게임의 화면은 여전히 바쁘게 번쩍였고 이제 막 펼친 숙제의 페이지는 사실 어제 했어야 했던 페이지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과자 부스러기쯤은 가볍게 눈 감는다.

아들의 손에 들려진 책이 거꾸로 된 것엔 번호키를 조금 더 천천히 누르지 못한 내 탓이 크다. 이 정도면 급습이다. 이런 배려심 없는 엄마 같으니.


어린 시절.

숙제나 청소를 해놓으라 당부하며 시장을 갔던 엄마가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을 때, 나도 저런 표정으로 엄마를 맞이했을까. 좋지만 좋지 않고, 반갑지만 반갑지 않은 표정.

계피맛 사탕을 입에 물곤 아닌데? 자두맛 사탕인데? 하며 괜한 고집을 부리던 표정이 저랬을까.

이제 막 10살이 된 아이는 내적 갈등을 엄마의 귀가를 통해 배우고 있다.

아들의 얼굴 위로 스친 당황스러움이 어느 날은 웃음의 이유가 되고 또 어느 날은 한숨의 이유가 된다. 그리고, 어제는 한숨이 나는 날이었다.


근평 때문에 인사 상담을 요청했었다. 승진 순위가 드디어 열손가락 안에 들어와 이번 근평이 아주 중요했다. 인사철마다 찾아가서 힘들다 호소하며 울어야 된다고 듣긴 했으나 막상 가니 눈물이 나진 않았다.

이제 막 발령 난 인사담당자는 나를 전혀 몰랐고 당연히 나의 승진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어 보였다. 나한테나 중요한 일이지 담당자에겐 몇백 명이 넘는 하위직의 인사 중 하나였다. 승진 순위는 얼마든지 밀릴 수 있고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결정한다는 원칙 선언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모두가 다 힘들고 고생하고 있다는 말에 아직 꺼내놓지도 못한 나의 '힘듦'이 괜한 엄살처럼 느껴져 차마 뭔가를 말할 수도 없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래도 나에게는 이번 근평이 너무 중요하니 살펴봐주십사 부탁하곤 상담실을 나왔다. 길어야 4~5분 정도였겠지만 그저 서로의 시간을 빼앗았던 무의미한 시간이었기에 조금 많이 부끄러웠다.


실은 그 누구보다 밀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울컥 눈물처럼 차오르는 걸 삼켜가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씩씩거리며 일을 하다가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더니 나를 맞이하는 아들의 표정은 딱 '앗! 빌런이 나타났다.' 이거였다.


아주 잠시 슬펐다가 원망스러웠고 이런 생활이 지긋지긋해서 더는 못 하겠다 싶었다. 야근의 고단함도, 오자마자 아들의 숙제 검사를 해야 하는 피곤함도, 죄다 서러워서 눈물이 차올랐다가 가라앉으니 화가 솟구치기 시작해서 눈가가 검붉게 변해 갔다.

왜 숙제를 안 했냐며 아들을 야단쳤다. 언제까지 엄마가 너 숙제를 살펴야 하느냐고, 소파에 누워 있던 남편한테도 들리게 크게 소리치며 아들을 잡았다. 아들의 얼굴엔 '엄마는 왜 또 급발진이지?' 하는 의아함이 떠올랐고 TV를 보던 남편이 갑자기 테드창의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하길래 '아, 나는 정말 이 구역의 빌런이구나.' 깨달았지만 이제 와서 멈추기엔 체면이 서지 않아 잠들기 전까지 쭉 화를 내었다. 남은 밤이 길지 않아 다행이었다.


잠들기 전 아들이 "엄마는 왜 같은 말을 단어만 바꿔서 계속해? 나는 한 번만 말해도 다 알아듣는데. "라고 물어왔다. 의문형이었지만 궁금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한 번만 말하면 네가 안 들으니까 그렇지."라고 대답하자, 내내 잠자코 있던 남편이 "그게 한 번에 고쳐지긴 좀 힘들지." 하며 거들었다.

이런. 내가 이 구역의 빌런이라서 아들과 남편은 그 어느 부자보다 유대감이 넘치며 끈끈하다.


사실 그 둘은 저녁 내내 아들의 방에서 어떤 꿍꿍이를 도모하고 있었다. 아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게임 속의 분위기를 그 방에다 만들고 싶었나 보다. 내가 도어록 키를 천천히 누르는 동안 "엄마닷!" 하며 두근거렸을 테고 "짜잔-!" 소리치며 놀라게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이미 잔뜩 흑화 되어 돌아온 내가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새벽에 잠이 깨어 아들의 방에 들어가 보니 나이키 비닐이 구름 조명을 가리고 있었다.

아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게임의 분위기가 정육점인가? 싶지만 아마도 그건 아니겠지. 남편이 알면 엄마가 되어선 애가 요즘 뭐에 관심이 있는지 도통 모른다는 소리를 할 테니 정육점 소리는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방 가운데에 멀뚱히 서서 저 나이키 비닐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역시나 어제 화를 내었던 것이 좀 부끄럽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엔 저 정육점 조명이 딱이겠구나 싶어, 아들의 부탁대로 저 비닐은 당분간 그대로 붙여둘까 한다.

혹여 승진에서 밀리더라도 아니, 아직은 내 차례가 아니더라도 빌런만큼은 되지 말자고 정육점 조명 아래에서 주먹을 꼭 쥔 채 다짐해 본다. 이미 빌런이겠지만 적당히 귀여운 느낌의 빌런이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선도 그어 본다. 악마 말고 '앙마' 정도?! 기왕이면 붉은앙마면 좋겠다.

10살 아들에게 아직은 엄마가 오는 소리가 반갑고 정다워야 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는 눈물은 그저 계피맛 사탕 때문이라 여기고 와그작와그작 씩씩하게 씹어 삼키자. 자두맛 사탕처럼 달콤하진 않겠지만 마냥 쓰지만도 않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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