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나지 않더라도해야 할일을 하는 이와 현실에부딪힌이상주의자
이준익 감독의 새 영화입니다. 코로나 19로 어려운 영화계에서 오랜만에 굵직한 배우들을 만나볼 기회가 생겨서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설경구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개인적으로 꽤 오랜만이네요. 아마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이 십여 년 전에 개봉했던 '해운대'이지 않나 싶습니다. 20대에 봤던 예전 '박하사탕'에서 그의 깊은 연기는 참 인상적이었지만, 점차 팍팍해지는 저의 30대 이후의 삶에서는 무겁고 진지하기만 한 그의 연기를 굳이 찾아보고 싶지는 않았나 봅니다.
변요한 배우는 그래도 저나 아내가 즐겨보는 영화에서 자주 얼굴을 봤던 것 같습니다. 2016년에 김윤석 배우와 함께 출연했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아내가 좋아하는 타임슬립을 기반으로 한 사랑이야기였죠. 처음 변요한 배우의 얼굴을 알기 시작했던 것이 드라마 '미생'이었는데, 첫 이미지는 가볍디 가벼운 소위 '양아치' 같은 이미지였는데, 몇 번의 주연작을 거치면서 나름의 선이 드러나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역사 속 사랑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아닌 데다, 귀향 간 학자의 연구생활과 그의 제자가 겪는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보니 여성 배우들의 역할이 크지는 않습니다. 설경구를 돌봐주는 이정은 배우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다른 작품에서 처럼 보기에 편안했고, 잔잔했습니다. 변요한의 아내로 나오는 민도희 배우의 역할은 개인적으로 좀 어색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극 중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은 아니지만, 선이 깊은 사극 중간에서 왠지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는 것 같았달까요. 둘 다 과거이기는 했지만, 다른 세 배우의 신이 1800년대였다면, 민도희 배우가 나오면 왠지 1980년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집필한 어류도감의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흑산도, 지금도 서해 한복판에 떠있는 오지 중의 오지인데, 조선시대에 그곳은 어땠을지 상상도 잘 되지 않습니다. 다산 정약용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목민심서를 쓰고, 수원 화성을 쌓고, 부정과 무능을 경계하라는 명언 등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이 많습니다. 사실 저는 정약용 위주의 신유박해 사건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었지만, 역사에 워낙 지식이 얕다 보니 정약전과 자산어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역사를 정확히 다루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영화상으로 보이는 정약전의 생각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고자 정치적인 변화에 초점을 두었다면,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민생에 도움이 되는 자료를 남기고자 했습니다. 옳고 그름이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세상에는 목민심서와 같은 책도 필요하고 이 자산어보와 같은 책도 필요하겠죠. 어쩌면 정약전은 흑산도라는 오지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집중했던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누군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대단하게 보아줄 책이 아닐 수 있지만, 누군가는 이러한 내용을 정리해 두어야 한다는 마음이었을까요. 저는 지금의 시대에도 이런 책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관심 있어하는, 소위 트렌딩 되고 있는 특정 이슈들에 대한 책만 시기별로 유행을 타는 요즘에, 꾸준하게 자신의 분야를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모든 분야가 고르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겠죠.
설경구가 연기했던 정약전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갔다면, 이 흑백영화의 다른 이야기 줄기는 변요한이 연기한 창대의 이야기입니다.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흑산도에 버림받았으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심지가 곧은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어찌어찌 기회가 닿아 육지로 올라가서 공직생활에 이르나,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는 성리학 조선의 지방행정 현실은 그가 읽어오던 유교 이론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창대를 통해서 지금의 우리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괴리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요.
최근 가장 큰 사회적 키워드는 '공정'이었습니다. 공정치 못하게 고위공직자의 자녀들이 명문대학에 입학을 하고, 교사의 자녀들이 시험문제를 유출해서 고득점을 받고, 사회적인 불평등이 세습되는 문제에 따라 젊은 세대의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 쌓여만 갔죠. 흑산도 창대는 진사에 합격하여 소위 '개천에서 난 용'이 되었으나, 기성세대의 부조리에 치를 떨고 제 발로 그곳을 뛰쳐나옵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다'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마지막 엔딩신을 제외하고 모든 장면이 흑백으로 진행되는 것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컬러사진을 보다가 흑백사진을 보면 좀 더 피사체에 집중할 수 있곤 합니다. 인물사진이라면 대상의 표정, 주름, 정물이나 풍경사진이라면, 그림자 한 조각까지 말이죠. 영화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컬러로 연출되었다면 아마 흑산도의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로 인해 이 잔잔한 이야기가 집중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섬마을 이야기가 아니라 민생과 사회문제였을 테니까요. 많게는 네댓 명, 적게는 두 명으로 좁힐 수 있는 집중된 인물관계와 흑백 연출을 통해 이준익 감독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간결하게 잘 전달한 것 같습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