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리 머그잔'을 버립니다.

한 때는 느낌 있어 보였었는데

by jim

한 달 넘게 틈 나는 대로 버릴만한, 안 쓰는 물건들을 찾다 보니 이제 얼추 '제 물건 중'에서 '고민 없이 버릴 만한' 물건을 찾기가 슬슬 어려워집니다. 분명 안 쓰는 것이기는 한데 이런저런 이유로 막상 아직 버리기가 주저되기도 하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이 집에 쌓여있는 물건 중에 제가 단독으로 결정해서 버릴 만한 물건이 그렇게 많지 않기도 하더군요.



원래 아내는 철이 바뀔 때마다, 집안을 어느 정도 정리할 때마다 이런저런 물건들을 버리고 비워왔습니다. 지난 주중에 주방 찬장에 있는 잔들 중에 안 쓰는 것들을 한쪽에 정리해 둘 테니 저도 관심이 없는 물건들은 버리라고 하더군요.


생각보다 주방에 안 쓰는 물건이 많더군요. 20대에 막 결혼했을 때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한 결혼이기도 해서 집에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자주 놀러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다못해 물컵, 맥주잔, 앞접시라도 좀 더 필요했죠. 30대가 되어 제법 구색을 맞춰 살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몇 인 세트로 구성된 식기들이 분위기에 맞게 종류별로 늘어갔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의 시간이 쌓이고, 편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각자 가정을 꾸리고, 각각의 삶이 복잡해지고, 일도 많아지면서 점차 예전처럼 집에서 볼 기회는 점점 줄었습니다.


예전에는 열명이 채 안 되는 팀에서 밑에서 순서를 세고 있어야 하는 입장이었고, 비슷한 처지의 동료, 선후배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는 금요일 저녁이면 항상 집이 복작복작했었죠. 그런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위치를 앞에서부터 순서를 세야 하고, 누구를 집에 초대하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상대방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굳이 가족의 노력까지 들여서 모두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도 하고요.


작년부터 벌써 2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도 한몫을 했습니다. 더더욱 누군가를 만나고, 초대하는 것이 어려워졌죠. 그러다 보니 사실 매번 같은 물 컵, 같은 밥공기, 쓰던 접시에만 손이 갑니다. 쓰는 물건들은 자연스레 손에 가까운 곳에 모이고, 언제 꺼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들은 살짝 까치발을 들어야 손이 닿는 맨 위칸에 올라가 있더군요.


여기저기서 기념품으로 받은 머그잔들, 신혼 때부터 오래도록 사용해서 커피 얼룩이 이제는 잘 지워지지 않는 커피잔들, 뚜껑이 고장 나서 들고 다니기 어려운 스테인리스 텀블러 등등. 그런 것들은 사무실에 가져가서 하루 이틀 쓰고 버리고 오곤 했습니다. 일회용품 쓰레기도 줄일 겸, 마지막까지 그 물건의 목적을 다 할 겸 해서 말이죠.


오늘 아침에는 그렇게 쓰고 버리기에도 애매한 유리잔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손잡이와 뚜껑 달려있는 유리잔인데, 영어로는 Mug Jar 또는 Jar Mug라고 하더군요. 미국 6~70년대 영화에 나올 법한 레트로 한 디자인의 컵이죠. 한때 여름 음료를 담아 마시기에 유행을 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업 납니다. 투명한 유리잔에 레몬 슬라이스를 담아서 얼음과 함께 내오면 보기에도 시원한 그런 잔이죠. 뚜껑이 있어서 이런저런 것들을 담아서 보관할 수도 있게 생기기는 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물건은 결혼하고 몇 년 지나서 아내가 샀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됩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자들의 관심이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다는 것이죠. 어릴 때는 자그마한 액세서리에 관심이 많다가, 조금 용돈이 늘어나면 옷가지 쇼핑에 눈을 뜨게 되고, 그러다 보면 가방으로 관심이 옮겨간다고 합니다. 결혼을 하고 집을 꾸미기 시작하면서, 본인의 외형에 쏠리던 관심이 그릇으로 옮겨가다가, 조금 안목이 넓어지고 여유가 생기면 가구 쪽으로 바뀌고, 종국에 가서는 '집' 자체에 꽂힌다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이 유리잔들은 아마 아내가 그릇들에 관심이 있을 때 즈음에 샀던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이 머그잔들은 기능상, 외형상,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안 쓰는 것이기 때문에 버리기로 했습니다. 굳이 단점을 찾자면, 완전히 투명한 잔이라면 모르겠는데 색이 들어간 투명 잔이다 보니 내용물의 색이 다르게 보입니다. 내열 유리가 아니다 보니, 찬 음료 위주로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고, 뜨거운 차 종류를 담기에는 적합하지도 않습니다. 뚜껑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작은 손잡이 달린 잔에 무어를 담아서 보관할 일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멀쩡한데 좀 두고 다시 유행이 돌아오면 꺼내볼까 생각하다가, 많지 않은 식구가 사는 집에, 몇 년 동안 꺼내지 않은 유리잔을 쌓아둘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점점 대부분의 식기들이 가장 단순한 형태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가급적 색이 많이 들어있지 않은 것들. 가급적 디자인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것들. 흰 셔츠와 검은 바지가 어떤 옷에도 잘 어울리듯이 식기도 그런 단순한 것들이 여기저기 다 어울리는 것 같더군요.


이런 종류의 식기 위주로 점차 바뀌게 된 것은 아마 이케아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시간이 꽤나 흘러 이케아가 자연스러운 우리 삶의 일부지만, 처음 들어왔을 때는 꽤 새로웠죠. 외국에서 공부할 당시 이케아에 들려서 이런저런 생필품을 준비하면서 '우리나라는 왜 이런 합리적 옵션이 없을까'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중국에 친지 방문차 며칠 여행을 갔었을 때도 - 지금 생각해보면 참 쓸데없이 - 굳이 이케아를 찾아가기도 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이케아의 가구는 잘 모르겠고, 식기 섹터를 둘러보는 것을 꽤 좋아합니다. 마치 자라나 유니클로 같은 스파 브랜드를 둘러보는 기분이랄까요. 그 해에 유행이라던가, 그 브랜드 또는 디자이너가 '밀고 있는' 것들 위주로 깔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가든지 이 종류의 물건들은 여기에, 디자인과 색상 순서는 이렇게 배치되어 있죠. 큰 변화 없이 말입니다. 유니클로에서 흰 셔츠를 구매하기 위해 저쪽 구석으로 바로 가서 사이즈만 보고 꺼내오면 되듯, 이케아에서는 이런 접시가 필요하면 그쪽에 가서 원하는 디자인과 색상을 골라오기만 하면 되죠.


보통의 대부분의 브랜드, 일반적인 매장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디자인이, 이런 텍스타일이 유행이라고 하면 온통 매장에 그런 것들밖에 없습니다. 나는 바지 밑단이 조금 좁게 붙은 청바지를 사고 싶은데 부츠컷, 나팔바지가 유행이면 정말 내가 원하는 바지를 찾기 쉽지 않습니다. 결국 스파 브랜드에 가서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디자인별, 색상별 수많은 청바지 중에서 필요한 것을 고르게 되죠. 제게는 이케아의 그릇이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식기라는 것이 음식과 음료를 담는 것이다 보니, 그 분위기와 음식의 종류에 따라 어울리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집에서 그냥 식구들끼리 먹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케이스에 최적화된 세트를 다 구비할 수 없다면 모든 케이스에 튀지 않는 세트로 정리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렇게 점차 점차 변해가고 있는 주방 찬장을 보면서, 이 어수룩하게 색깔이 들어간, 다른 식기와 어울리기 제법 어려울 것 같은 이 유리잔들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재활용품으로 분류할 것이기는 하지만 또 쓰레기를 만들었다는 것에 한쪽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버리는 것'이 문제라기보다 '결국엔 버리게 될 것'을 '별로 쓰지도 않았으면서' '굳이 샀던 것'이 진짜 문제였겠죠. 지구 상에 늘어가는 쓰레기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덜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물건을 버리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합니다. '굳이 이걸 버려야 하나? 일단 두어볼까?' 쓰지 않는 물건을 쌓아두고, 이사 다닐 때마다 이를 또 돈 주고 옮기고, 이삿짐 차량 매연에 지구 상에 탄소배출도 늘어납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물건을 버릴 때 하는 고민을 조금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물건을 살 때부터 '이게 정말 필요한 것인가?' 짚어보아야겠습니다. 애초부터 사지 않았으면 고민할 일도 없었고, 쓰레기를 만 들일도, 이삿짐 차량으로 옮기고 다닐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