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내가 '파니니 그릴과 테이블 매트'를 버립니다

그러게 변압기(도란스) 필요하다고 했잖아

by jim

제가 이것저것 조금씩 티 안 나게 버리기를 몇 주, 몇 달. 연말이면 슬슬 이사 시기도 다가오고 해서 아내도 이것저것 지난 몇 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물건들을 꺼내어 살펴보고 하나씩 버리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주방에 버릴만한 물건이 많습니다. 코로나19도 있고, 이제 무리 지어 이 집 저 집 놀러 다니던 나이도 지나고 해서 생각보다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지 않더군요. 몇 안 되는 식구들이 매번 자기가 쓰던 물건만 꺼내어 쓰니까 말이죠.



아내가 버리겠다고 한쪽에 꺼내어 둔 물건을 보니 정말 여기 이사 온 몇 년 전부터 한 번도 꺼내어 쓴 적이 없는 물건입니다. 파니니 그릴, 사실 우리나라 가정집에 있을 필요가 없는 물건이죠. 굳이 전기그릴이 없다 하더라도 샌드위치를 바삭하게, 치즈를 부드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무조건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프라이팬을 사용할 수도 있고요.


이 물건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산 제품이 아닙니다. 아마 아무리 흥청망청 이것저것 사던 시절이라고 하더라도 이 물건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기도 하고요. 미국 유학 당시에 근처 백화점 가전제품 코너에서 할인하던 차에 싸게 10불 내외로 구매했던 제품입니다. 미국이라서 샌드위치를 구워 먹을 생각에 구매한 제품은 아니었습니다.


작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크로플이니 김치전 와플이니 뭐니 와플 메이커로 이것저것 양면을 바삭하게 구워 먹는 것이 유행입니다. 집에서 많이들 따라 하기도 하시고, 이런 제품을 파는 매장들도 제법 생겼죠. 이 파니니 그릴은 와플 메이커처럼 벌집 모양을 만들어 주지는 않지만 위아래 철판에서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나와서 음식을 익힐 수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제품입니다.


미국 생활 당시 초반의 삶은 거의 캠핑 수준에 가까웠습니다.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에, 바닷가가까지 걸어갈 수 있고, 안전하기까지 한 평온한 동네였으니 말이죠. 스튜디오라고 부르는 단칸방 월세가 한 달에 150만 원 정도였습니다. 남들은 미국은 집들이 널찍널찍해서 월 렌트비 백만 원 넘으면 수영장도 있다더라는 카더라를 듣고 왔지만, 그건 저기 차 타고 몇 날 며칠을 가야 하는 동네 이야기였습니다.


집이 좁기도 했지만, 사실 언젠가는 돌아와야 하는 끝이 있는 생활이었기 때문에 무어를 많이 챙겨가지도 않았고, 많이 늘릴 생각도 없어서, 신발은 신발장을 사는 대신 튼튼한 박스나 와인 상자 같은데 보관하고, 소파 대신에 튼튼한 캠핑의자를 사서 필요하면 밖에 들고 가서 쓰기도 하고, 그렇게 반은 캠핌, 반은 생존과 같이 지냈었죠.


미국 생활 당시 그래도 부담이 없었던 것은 미국 마트에 가면 지방이 붙은 돼지고기, 즉 삼겹살이 저렴했고, 외국인들이 먹지 않는 소고기 특수부위, 즉 곱창도 아주 저렴했습니다. 한국 식자재가 비쌀 것이라는 막연한 우려도 있었지만, 몇 군데 잘 뒤져보면 사실 한국보다 더 싼 제품도 많았습니다. 소주를 제외하면 말이죠.


김치 같은 경우에도 유리병에 들어있는 '썬 김치'를 아시아 마켓에서 많이 팔았었는데, 김치가 없어도 무방한 저에게는 '김밥천국 김치 맛'의 그 김치가 딱 좋더군요. 가격도 부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각종 브랜드에 화려한 포장지의 부담스러운 그 김치들보다 나았죠. 여담으로, 저는 그 썬 김치가 Sun 김치라는 브랜드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썰어놓은' 김치라는 뜻이더군요.


다시 파나니 그릴 이야기로 돌아가서, 삼겹살이 저렴한데 집에 삼겹살을 편하게 구워 먹을 만한 도구가 없었습니다. 집 앞 공원에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는 그릴이 있지만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숯불 위에 굽는 것은 스무 살 대학생 MT 때나 할 법한 실수이고, 삼겹살은 불판에 구워야 제맛이죠. 그렇다고 얼마나 쓰겠다고 널찍한 전기 불판을 사기도 그렇고, 그냥 철판만 사자니 그럼 도 휴대용 버너를 사야 하고, 계속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더군요.


그러다가 만난 것이 이 파니니 그릴이었습니다. 딱 좋더군요. 심지어 덮개를 눌러놓으면 위아래로 한 번에 익혀주니 뒤집을 필요도 없고, 살짝 기울어진 앞쪽에 기름통이 있어서 기름도 다 받아주더군요. 원래는 녹은 버터나 치즈의 지방이 흘러내리는 곳이었겠지만요. 원래는 샌드위치를 먹음직스럽게 보이기 위한 살짝 돋은 세로 그릴이 삼겹살에도 맛있어 보이는 그릴 자국을 남겨주었습니다. 그렇게 미국 생활 당시 이 전기그릴로 아내와 셀 수도 없이 많은 둘이 삼겹살 파티 즐겼습니다. 집에서 소주를 사러 가려면 몇십 분을 운전해서 가야 했기 때문에 금요일 저녁에 집에 소주가 똑 떨어졌을 때면, 집 근처에서 살 수 있는 보드카를 소주잔에 담아 대신했던 기억이 모락모락 피어나네요. 여담이지만, 짜장면을 먹으려면 한 시간 반은 나가야 했던 관계로 유튜브에서 요리 레시피를 찾아서 직접 만들어 먹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고 나니, 집에 멀쩡한 큰 전기 불판도 있고, 휴대용 버너도 있고, 갖가지 바비큐 장비들이 있어서 이걸 전혀 쓸 일이 없더군요. 더더욱이나 이 제품은 무려 미제 제품이어서, 110v 전기에서만 작동합니다. 220v에 꽂으면 바로 고장이죠. 이미 그렇게 미국에서 살 쓰다가 가져온 다이슨 냉온 선풍기가 아내의 첫 전원 버튼에 사망해 버린 사고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변압기를 쓰라고 이야기했는데, 콘센트 모양만 바꿔주는 일명 '돼지코'가 변압기인 줄 알았다고 그러네요.


미국에서 쓰던 가전제품 몇 개 때문에 변압기를 사기는 했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파생 소비죠. 10불짜리 파니니 그릴을 버리지 않고 쓰겠다고, 5만 원짜리 변압기를 사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무시무시하게 생긴 변압기를 아내가 거실이나 주방에 꺼내놓을 리 만무했습니다. 한쪽 구석에 치워진 그 무거운 변압기를 쓸 때마다 꺼낸다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죠.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별로 쓸 일이 없는 파니니 그릴이, 더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샌드위치를 토스트 할 때도 그냥 제일 작은 팬은 꺼내서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그렇게 한두 번 뒤집는 것이 훨씬 간편했죠.


멀쩡한 제품이고 아무 문제없지만 역시나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꺼내지 않았고, 앞으로도 쓸 일이 없는 데다가, 변압기까지 필요한 제품이어서 누구를 줄 수도 없더군요. 저는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버리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옆에 있던 테이블 매트도 멀쩡해 보이는데 왜 버리나 했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사 이후 몇 년간 저 매트들은 꺼낸 적이 없더군요. 지금 식탁에서 쓰고 있는 것들은 사각형 형태의 무채색 계열의 컬러, 그리고 평평한 형태입니다. 계절이나 유행을 타지 않는 무난한 디자인에 겉에 뭐가 묻어도 닦기 쉬운 재질인 것이죠.


반면 아내가 버리겠다고 꺼내 놓은 것은 계절을 탈 것 같은 녹색 계열에, 겉에 오돌토돌한 패턴이 있습니다. 고추장 같은 양념이라도 떨어지면 닦기도 어렵죠. 원형 매트의 경우에는 둘이서는 괜찮은데 여러 명이 모였을 때 다른 매트들과 매칭 하기도 좀 어렵고, 메인 디시만 딱 먹는 것이 아닌 반찬 몇 가지라도 널어놓고 먹는 우리 한식 스타일에는 별로 맞지도 않는 디자인이기도 했습니다.


멀쩡한 매트를 뭐하러 버리나, 잠시 생각했지만, 어차피 안 쓸 거 뭐하러 짊어지고 다니나, 이쪽으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비워가는 서랍들을 보니 가슴 한편도 시원해지더군요. 아마 아직도 주방 구석구석에는 엇비슷한 이유들로 안 쓰는 물건들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한 번에 다 꺼내서 골라내려면 또 일이 커지고 귀찮아지지니 다음번에 하나씩 다시 열어볼까 합니다. 오늘은 이 정도면 성공이지 않을까요.

이전 03화오늘은 '유리 머그잔'을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