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그리고 근현대 여성의 삶
습하고 더운 주말에 무슨 텍스트에 파 묻혀볼까 이른 새벽부터 기웃거리다가, 아내의 대출도서 중에서 코랄 핑크 표지의 작은 소설책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제목은 '시선으로부터'. '시선'이라고 하길래 'eye, sight, gaze' 정도의 의미를 생각하고, 무언가를 조망하는 이야기인가 보다 했는데, 극 중 주인공의 이름이 '시선'이었고, 그녀로 부터 시작된 가계가 이 이야기의 주된 소재였습니다. 물론 '심시선' 그녀의 삶 자체를 조망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니, 이 모호한 제목을 중의적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타신 배우 윤여정 님을 비롯하여 한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오신, 살아가고 계신 아이코닉한 여성분들의 이야기가 각종 미디어에 많이 회자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작 중의 심시선은 이런저런 삶의 우여곡절로 한국, 하와이, 독일, 프랑스를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당시 사회상에 순응하지 않고 삶을 개척해온 여성 예술가로 등장합니다.
소설은 시선의 사후에 자녀들이 그녀의 10주년 제사를 하와이에서 해 보자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선의 글과 목소리를 인용하는 방식을 통해서, 자녀들이 그녀를 회상하는 방식을 통해서 젊은 시선의 이야기와 돌아가시기 전의 할머니 시선의 이야기, 총 세 가지 시점의 이야기가 마치 땋아 내린 긴 머리카락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입체적인 구성이 참 좋습니다. 솔직히 하나의 시공간 차원에서 주욱 서사되는 이야기보다 덜 지루하거든요. 시간이 되었든, 공간이 되었든, 인물이 되었든 적당히 다차원적으로 구성된 이야기가 주의 환기에 좋은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코로나가 한창인 작년에 발간되었습니다. 코로나로 모두의 발이 묶여있던 시기에, 하와이 여행을 다룬 소설이라. 꽤 괜찮은 시도인 것 같습니다. 적당한 타이밍이라고나 할까요. 작 중에서 어떤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앞뒤 없이 갑자기 '금융계의 조직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어쩌면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시장경제의 최일선에 있는 집단인데, 마치 절대 악으로 표현되어 있는 부분에서 '반자본주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었나, 은근한 끼워넣기 시도인가' 생각했었는데,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전 국민의 발이 묶인 코로나 시국에 하와이 여행을 다룬 소설이라니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냄새를 느꼈습니다.
본의 아니게 집히는 대로 읽게 된 소설 중에 여성작가가 여성을 중심적으로 쓴 작품을 요새 몇 편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남성주의적,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편협하게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왜 꼭 남-녀 대결적인 구도를 만들어야 되는 것일까요. 왜 여성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고 생각이 있는 존재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있는데, 여성작가의 극 중에 등장하는 남성은 생각과 이유가 불충분하고, 무언가 모자란 부분이 있는 것일까요.
올해 초 정도에 해리포터 작가인 J.K. 롤링이 인종차별 논란에 휘말렸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에는 유색인종이 등장하지 않거나, 주요한 역할이 없다는 것이었죠. 어쩌면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남성에 대해서 가벼이 그리고 있는 것도 일종의 차별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몇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작 중의 염산테러 피해자가 남자였을 수도, 가해자가 여자였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폭력을 미화할 수는 없지만, 폭력의 주체가 지금 그려진 것처럼 단역이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 속에서의 주연이었다면 조금 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까요.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 등 다양한 가족 구성원들이 하와이에서 겪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찾아보는 재미가 솔솔 한 책입니다. 박물관, 미술관, 파인애플 농장, 다이빙, 서핑, 팬케이크, 훌라춤 등등. 하와이 여향 브로셔라고 해도 될 만큼 하와이 여행의 대부분을 담고 있습니다. 책을 덮는 중간중간마다 코랄 핑크의 표지를 보면 수년 전 하와이 여행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다만 극 중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조금 폭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같이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서대로 대화를 진행하는 것은 비일비재하곤 합니다. 예술가에 의해 적혀내려 간 글이어서 그런지 굴곡이 있었던 예술가의 삶과 부암동 구도심의 도회적인 삶에 대해서는 적당히 미화(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식의)가 있는 반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등의 보통의 삶에 대해서는 은근한 무시와 연민이 서려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삶이란 건 다 나름의 방향과 속도가 있을 뿐, 더 나은 삶과 못한 삶을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요.
하와이는 참 좋았는데, 등장인물의 구성과 메시지는 좀 머리를 복잡하게 합니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유년시절을 보내다 보니 적토마를 타고 중원을 내달리는 관운장 같은 남성성에 제가 고착되어 있을 수도 있겠죠.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에서 원하는 순종적이고, 경청해주고, 이타적이고, 항상 기다려줘야만 하는 남성상에 대해서 자연스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창 쿡방이 유행하던 시절, '남자는 요리를 해야 섹시한 시대이고, 여자는 라면을 못 끓여도 흉이 되지 않는 시대'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당시 이 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요리를 잘하면 좋은 것이고, 남자든 여자든 라면 정도는 '관심'과 '배려'만 있으면 못 끓일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꼭 이렇게 수백 페이지의 지면을 빌어서, 남녀 성을 구분해 놓고 직설적이고, 적극적이고, 생각과 이유가 많은 존재로서의 여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성에 맞는 가치가 있다기보다, 개인에 맞는 것들이 다르다고 하는 게 맞을 테니까요.
책 속에 돈 이야기는 없습니다. 온 가족이 하와이 여행을 가서 원하는 것을 저렇게 하려면 사실 수천, 수억이 들 텐데 말이죠. 이런 면에서는 거의 판타지입니다. 그러면서 위에 잠시 이야기했던 것처럼 금융시스템, 시장경제에 대한 어렴풋한 반감을 심고 있습니다. 하와이의 문화와 역사를 살펴보는 대목에서는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바라보면서 은근한 반미 정서를 심기도 합니다. 어릴 적에는 예술, 문학 이런 것들이 가장 순수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엇비슷한 성격의 작품을 보면 볼수록, 한쪽의 의도를 '티 내지 않고' 관철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만약에 계획적인 장치였다면 오히려 대놓고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하는 것보다 이러한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세뇌가 더 순수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9.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20. 베이식을 갖춘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고 봅니다. 안쪽에 찌그러지고 뾰족한 철사가 있는 사람들, 배우자로든 비즈니스 파트너로든 아무 데도 못 갖다 써요. 꼭 누군가를 해치니까.
23.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 한 게 없었다.
28. 천 권과 함께라면 시누이들과의 여행도 견딜 수 있을 터였다.
66. "다시 태어난다면 새나 물고기처럼 아주 가벼운 영혼이고 싶어."
72.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행위는 읽기라고, 동의할 만한 사라들과 밤새 책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93. "하와이에 와서 뭘 왕창 배우고 들 있잖아. 보통은 안 그러지 않나?"
105. 탁월한 재능이 엿보인다고, 좋은 기회를 주겠다고, 나에게 관심 있어할 사람들을 소개해주겠다고 후하게 제시하는 사람을 그냥 믿어서는 안 되었다.
115. "오리에게 친절한 사람들이 사람에겐 친절하지 않다는 게 이상해요."
128. 자신이 사는 곳을, 속한 곳을 한 번이라도 낙원이라고 불러본 적이 있던가. 너무 생소한 태도였다.
141. "결정적인 순간에 타인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스스로가 다치게 되어도, 그런 의미로?"
153. "원래 모든 운동은 계단식으로 느는 거야.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포기하면 안 돼."
158. 급정거에 급출발, 급커브가 일상다반사인 한국 버스에서는 책을 잘 읽지 않지만 하와이의 버스에서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160. 두 사람은 진짜 하와이 사람이라면 별로 맛있어하지 않을 푸드코트의 음식을 맛있게 먹고 천천히 구경을 했다.
166. "쓰는 게 뭐 대단한 것 같지? 그건 웬만큼 뻔뻔한 인간이면 다 할 수 있어. 뻔뻔한 것들이 세상에 잔뜩 내놓은 허섭쓰레기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진짜 읽을 만한 걸 찾아내는 게 더 어려운 거야."
169. "말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힘들지?"
183. 할머니는 욕도 표현의 일종이라고, 다만 정확하고 폭발력 있게 욕을 써야 한다고 말했었다.
214. "음 네, 여기가 천박한 시장 바닥이 되는 걸 막으려는 사람들은, 착취적이지 않은 진짜 삶을 꾸려가는 사라들은 모두 로컬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210. "즐겁게 그리고 쓰고 노래하고 춤추는지, 하지 않으면 괴로워서 하는지 관찰하십시오. 특히 후자라면 더더욱 인생의 경로를 대신 그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아이들을 움직이는 엔진은 다른 사람이 조작할 수 없습니다. 네, 다른 사람입니다. 부모도 결국 다른 사람입니다."
225. 그런 화제들을 꺼내면 네가 커서 고쳐, 공부 열심히 해서 고쳐, 하고 아주 우습다는 듯 대견하다는 긋 반응해오는 것도 짜증 났다. 자기들이 신나게 망쳐놓은 다음 어쩌라고? 뭐든 나중에 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웃겼다.
226. 어른들은 기대보다 현저히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해림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29.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모퉁이가 찾아오면 과감히 회전하세요."
233. 난정은 주로 책을 읽었고, 책을 읽고 난 다음에도 그 책에서 뻗어 나온 생각들을 머릿속으로 따라가기 바빠 앞뒤 좌우를 설명해주지 않고 중간부터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235. "어쨌든 하와이를 좋아하면 하와이에 오면 안 되는 거였어. 제주도를 아끼면 제주도에 덜 가야 하는 것처럼." "오기 전엔 몰랐잖아. 와야 알 수 있는 것들인데."
243. 한국에 있으면 혹사만 당하고 돈은 별로 벌지 못할 것 같아 미국으로 갔더니, 미국은 자발적인 혹상 가까웠고 돈은 배로 받지만 생활비도 배로 들었다. 결국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 고심스러웠다.
244. 이미 다 있었던 것이다. 이미 있었던 것을 피해 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248. 내면이 충실한 삶은 분명 중요한데, 그것이 여성에게서 세속의 성취를 빼앗아가려는 책략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성취를 하려니 생활이 망가지고, 일만 하다가 죽을 것 같고.
263. 직접 일을 할 때가 좋았지, 관리직은 어렵고 예민했다. 사원들이 좋아하는 부서장은 클라이언트가 싫어했고, 클라이언트가 좋아하는 이는 사원들이 싫어했다. 누가 능력 있고 무능한지 헷갈리기 십상이었고 어디를 개선해야 할지 막막한 부분들도 많았다.
265. 금융계 특유의 소모적인 회의 시간, 진짜 일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하는 게 바깥에 티가 나야 하는 겉치레 문화, 효율적이지 않은 결정 단계들, 여성 혐오적인 언행들과 부적절한 접근까지 어느 하나 괜찮은 게 없었던 모양이었다. 내 회사야 내가 바꾸면 되지만 남의 회사 조직 문화를 어떻게 해야 하나?
269. 부엌 뒷방, 작업실 같지도 않은 작업실에서 작은 캔버스에 그리고 있었는데 움츠러든지도 못 알아챘던 겁니다. 생활이 너무 바쁘고 여유가 없었으니까. 내가 화가라는 걸 잊고 있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까.
273. 반대의 언어를 잘 갖추고 있지 않아서 반대를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276. 비행기에 삼백 명이 타면 몇 명쯤은 상종하기 싫은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278. 어쨌든 태호는 귀한 정보에 감사를 표했고, 언제 서울에서 맛있는 걸 대접하겠다고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했다. 지키려고 하면 오히려 폐가 될 그런 약속이었다.
313. "엄마는 어디 축사를 하러 가면, 꼭 오 분 안쪽으로 끝내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축사 요청이 자주 들어와 노년에 고생했지만요. 나이 들수록 말이 짧아야 한다고 강조하던 사람 딸이니까, 저도 짧게 이야기하고 훌라를 추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