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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Sep 02. 2020

오늘 다시 일어나라, 무너진 공든 탑의 잔해 속에서

호모쿵푸스의 대처법: 공들였던 소통의 길이 막혔을 때

“엄마, 내 엄마 맞아?” 


함께 길을 걷던 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런 맥락도 단서도 없이 불쑥 밀고 들어오는 이런 질문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실소를 터트리게 만든다. 아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다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가 말이다. 당시 아이는 여덟 살. 나는 다니던 직장을 일 년 휴직한 후 뉴질랜드로 떠났다. 남편은 직장일 때문에 함께 오지 못해, 그때까지 늘 남의 손에 맡겨 키우던 아이와 단둘이 타국에서의 첫달을 무사히 지나고 있던 때였다.


“그럼 물론이지. 근데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왜 그게 궁금해진 거야?”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뚱딴지같은 질문이 촉발한 대화는 결국 이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럴 땐 아이 마음을 좀 더 파고 들어봐도 다르게 물어봐도 소용이 없다. 아이는 애초부터 대답해 줄 생각이 없었던 듯 무심하다. 하지만 내용이 심상치 않은 이 질문은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이는 왜 그리 물었을까? 이게 무슨 의미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봐도 도통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때로 시간이 한참 지나 불현듯 되묻는 작전을 써 보기도 한다. “예전에 네가 그렇게 물었었잖아.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어?”라고 말이다. 그러면 아이는 대부분 “몰라, 잊어버려서 기억이 안 나”하며 모르는 척 지나쳐 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중요한 건 대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는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이의 마음에서 그때 그 질문의 유효기간이 이미 끝나 버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다 마주치는 질문은 질문의 내용보다는 질문을 던진 행위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대답을 듣지 못해도 그때 아이에게 그런 질문이 다녀갔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것을 차곡히 기억하는 일 말이다. 그렇게 질문이 다녀갔다는 기억의 기록은 당시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새로이 발견하게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휴직 기간을 회고하며, 나를 무척 당혹스럽게 한 아이의 질문을 풀지 못한 숙제처럼 계속 마음에 품고 있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이것은 그 당시 아이 마음과 나의 처지를 재해석해 볼 수 있는 유력한 실마리가 될 테다.


장면 1. 어느 날 함께 외출하려 아이 옷을 먼저 챙겨주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갑자기 드레스 룸 문을 활짝 열어젖힌 아이가 “엄마 뭐해?”라며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속옷을 챙겨입고 있던 반나체의 나는 흠칫 놀라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정작 문제는 다음이었다. 주섬주섬 옷을 찾는 엄마의 허둥대는 모습을 재미나게 바라보던 아이에게 당장 나가라고 소리친 후, 왜 그리도 화가 나고 불쾌한 감정이 가셔지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얼굴을 봤거나 거울에 비친 나를 보았다면, 그건 단순히 아이의 악의 없는 장난으로 당황한 여느 엄마의 표정이 아니라, 무도한 불한당에게 모욕을 당한 어른 여자의 표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때 왜 그리 예민하게 반응했을까. 나조차 내 감정에 놀랐으니까 말이다. 아이 역시 일그러진 표정을 한 엄마의 날카로움에 놀라고 심리적으로 거부당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격앙된 감정을 애써 누르며 외출을 서두르면서 상황을 수습했지만, 나중에 나는 “엄마는 옷 갈아입을 때, 같은 여자라도 또는 딸이라도 불쑥 들어오는 게 싫다”라고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장면 2. 아이 수학 숙제를 봐주고 있던 어느 오후였다. 매일 조금씩 풀기로 한 문제집을 앞에 두고 ‘수학이 싫다, 수학 숙제는 더 싫다’라며 그날따라 심한 짜증을 내는 아이를 간신히 달래서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아이는 그저 숙제를 빨리 해치우겠다는 심보로 엉터리로 대충 답을 적어 덮어버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한 문제씩 짚어가며 문제를 다시 풀게 했는데, 아이는 몸만 와 있을 뿐 영혼은 그곳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집중하자, 빨리 끝내자’는 잔소리를 반복하면서 내 안의 화도 달궈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내 손에 들려있던 연필 끝으로 아이 머리를 튕겼고 분노를 뿜고 말았다. 아파서인지 분해서인지 아이는 크게 흐느꼈고 내 속은 하얀 잿더미가 되었다. 


“내 엄마 맞아?”는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몇몇 기억나는 장면들과 연결지어 보니, 난생처음 회사에 가지 않고 집에 있는 엄마에 대한 생경함을 역설적 의문 법으로 표현한 것임을 헤아리게 된다. 아이가 관찰하고 경험하기에 자신이 알던 엄마와 달라진 측면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아이가 느낀 변화에는 좋은 것과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멈춤과 쉼이 필요해 선택했던 휴직이지만 실상은 배우자 없이 외국 타지에서 나 홀로 육아에 더해, 주중 5일 오전 원격 근무와 도무지 끝이 없는 집안일을 하고 있던 변화된 환경에서, 아이가 말한 이질감은 내가 나에게 느낀 감정이기도 했다. 


그때 이후로 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제나 지금이나 ‘해내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감의 압력이 ‘잘 해내고 싶다’는 욕망과 충돌해 취약성을 드러낼 때, 나는 송곳처럼 날카로워지거나 자신을 부싯돌 삼아 활활 타오른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의 나는 가장 친밀한 가족 또는 나 자신에게조차 낯선 타인 같은 존재가 된다는 사실도. 

우리는 오늘 다시 일어서는 중 


수많은 관계 속에서도 가장 이해 받기 원하지만 정작 이해를 베푸는 데는 가장 인색한 것이 또한 가족 아닐까?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히 기대어 숨 쉬는 환경이 되어 주는 가족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특히 내 분신 또는 확장된 자아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아이와의 관계는 누구보다도 마음의 균형추를 평온히 유지하기 어렵다. 


때때로 어이없는 실수로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 공들였던 소통의 길을 가로막게 되면 참으로 부끄러워진다. 잘 하고 싶었는데, 잘 해오고 있었는데 무심코 내뱉은 무심한 말과 행동으로 공들였던 탑을 와르르 무너뜨린다. 뒤돌아 후회해 보지만 늦었다.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어리석음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구나.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제대로 담금질하지 못했구나. 나는 대체 무슨 공부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자책이 밀려든다. 


이제는 안다. 좋은 엄마가 되자고, 현명한 부모가 되자고 읽고 쓰고 묵상하며 다짐하지만, 여전히 제자리 걸음인 자신의 실패를 추스르는 힘, 다시 나아가도록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바로 공부인 것을. 그런 의미에서 참사의 피해자를 돕는 거리의 치유사로 활동해 온 심리기획자 이명수의 고백은 단단한 위안과 용기가 되어 준다.


“우린 일상에서 여러 번 패하고 아직 채 일어서지 못했거나 어제 패하고 오늘 다시 일어서는 중인 사람들이다. 치유자라고 해서 지옥에 빠지지 않는 게 아니다. 그저 일어나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기에, ‘또 빠졌구나, 빨리 나와야겠다.’ 이렇게 담백해지는 거다.”


한차례 거센 폭풍우나 작은 비바람이 다녀가고 날이 개면 다시금 마음속 평화와 고요가 찾아 든다. 그럴 때면 내가 서 있는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내가 행할 공부는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디딜 뿐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수용하는 일뿐이다.


호모쿵푸스의 삶을 흠모하는 나에게 다시금 되뇐다. 이것은 나를 위한 독백이자 오늘도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이를 위한 응원이다.


'공부하는 자여, 그대는 일상의 수행자이니라. 하나의 행위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요, 어느 곳에 도달하고자 달려가는 것 또한 아니다. 그대의 공부가 시작되며 끝나는 이 지점은 그대가 사는 오늘 여기, 바로 이 시간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잊지 말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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