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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선임 Dec 01. 2021

9백만 원짜리 아기 전집을 상담받고 난 뒤

책 육아 방향성과 나의 판단기준

튼튼이가 책을 많이 읽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책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커서, 아기에게 읽혀주는 책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 시기적절하게 나의 직장 근처에서 베이비페어와 유아교육전을 한다기에 오후 반차를 쓰고 전집 브랜드들을 둘러보고 상담받으러 방문했다. 


들어본 브랜드도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브랜드도 있었다. 


들어본 브랜드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존재했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들이었고, 요즘 핫하다는 트렌디한 전집 브랜드들도 많았다. 박람회에 참가한 브랜드의 종류와 볼륨에 입장하자마자 압도당했다. 나는 임신기간 동안에는 코로나 때문에 한 번은 다녀온다는 베이비페어도 가지 않았어서 이런 박람회 형식의 행사 입장은 처음이었다. 


유아교육전을 방문하기 전에는 오늘 방문해서 최대한 상담받아본 후에 가장 괜찮아 보이는 영어교육 전집을 들여주려고 했었다. 영어라는 언어를 좋아하지만 좋아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기억이 뚜렷하기 때문에, 튼튼이만큼은 영어를 외국어가 아닌 준 모국어로 받아들였으면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담받아보니 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영어 교육을 시키고 있던 엄마들의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난... 종일 일만 하느라 업무 전화만 들려줬는데...) 


아기에게 시작되는 첫 번째 교육,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10개월에 시작하는 교육도 나는 늦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전집 없이 단행본으로 꾸려줘도 정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세상에 나오기 전에 시작하든, 말이 트이고 나서 시작하든, 언제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많은 책을 보여줄 것인가, 비싼 책을 다 모아 줄 것인가도 중요하지 않다. 엄마로서 튼튼이에게 필요한, 튼튼이가 좋아하는 것을 그때 그때 준비해주면 된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와 주양육자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하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배우게 된다. 집안에 장난감 하나가 없더라도 아기는 거뜬히 주변 사물을 보고 익히면서 성장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생후 6개월까지는 오감이 발달하는 시기라서 자연스럽게 주변을 익히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인위적으로 노래를 들려주거나 장난감을 쥐어주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반년이 지나고 나면 오감이 트이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즉,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면서 학습할 수 있는 단계가 시작된다. 나는 이때가 언어를 포함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적절한 시작 시점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처음으로 튼튼이를 앉혀놓고 책을 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지만, 한 번 두 번 지나가면 점점 더 눈길을 주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손을 뻗어 만지고 싶어 하는 관심 표현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지난 글에서 다루었듯이 튼튼이가 빨아들이는 책에 대한 열정이 상당해졌고, 이제는 양질의 책을 체계적으로 들여줘야 하는 시점이 되었구나 싶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말처럼, 아기가 받아들이고 습득하려고 하는 신호를 보았고, 그에 맞는 '좋은 전집'을 들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전 가보지도 않았던 박람회를 제 발로 찾아가서 하나하나 상담을 받았고, 각 브랜드마다 추구하는 교육 철학을 설명 들었다. 


상담받은 후에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남았다.  


'과연 이 전집들이 돈 값을 할까?'


박람회도 다녀왔고 어린이 서점에도 다녀왔고, 유명하다는 TOP 1 브랜드에서 전화상담도 받았지만, 하나같이 값이 사악했다. 교육사업 부서에서 일하면서 직접 강의안도 인쇄 발주해보았지만 이렇게 비싼 책들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요즘 태어나는 아기들이 없어서 시장에서의 공급이 줄었다고 감안해도 책이며 교구며 음원 CD며 하나같이 합리적으로 보이는 가격은 없었다. 


나는 돈이 많지 않아서 제 값을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을 신중하게 하는 편이다. 내가 원하는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응당 지불해야 하는 값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기준에 부합하는 브랜드는 박람회에 없었다. 백만 원 단위가 가장 작은 돈의 단위인 것 마냥, 카탈로그를 보면 너무나도 떡하니 몇백만 원의 값이 (정가도 아니고) 할인가로 적혀있다. 


특히나 영어교육 전집은 십만 원 단위를 본 적이 없을 정도였고, 아기가 가지고 놀면서 창의력을 키우게 한다는 원목 교구는 거의 백만 원에 육박했다. 심지어 내가 상담받은 브랜드 중에 가장 비싼 영어교육 전집의 가격은 정가로 9백만 원이었다. 박람회가로 할인받아야 7백만 원 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아기가 과연 이 전집의 모든 책이 다 필요할까?'


그리고 그나마 합리적으로 좋은 퀄리티의 책을 전집으로 꾸려서 파는 브랜드에서 전집을 보았는데, 권 수가 너무 많았다. 이 작은 생명체에게 아무리 책을 많이 읽히려고 한다한들 사오십 권의 전집을 한 질 씩 들이는 것은 '굳이?'라는 의구심을 들게 했다. 전집의 주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충분히 10권에서 많아야 20권 정도로 구성할 수 있어 보였다. 


실제로 튼튼이는 주제별로 10권 전후로 구성된 전집을 내가 엄선해서 사주고 있다. 이 10권 중에서도 좋아하는 책은 서너 권뿐이다. 물론 아기가 여러 책을 잘 보는 집도 있을 순 있지만 내 주변 대부분 아기들은 본인의 취향에 맞는 책을 자주 찾는다. 따라서 내 판단으로는 아기에게 어떤 주제나 익히게 하고 싶다면 그것을 주제로 삼는 볼륨이 적당한 책을 한 질을 들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하위분류로 쪼개어서 규모가 작은 전집 구성을 만들어 팔아도 될 것 같은데, 여러 가지 주제를 합해서 큰 볼륨의 전집을 만들고, '지금 튼튼이 시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여기에 다 있습니다' 하며 설명을 받는 기분이었다. 뭐, 물론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육아 철학에 따르면 이 시기에 필요한 것 중에 '튼튼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엄선해서 주고 싶은' 것이다. 


몇 군데 상담을 받고 잠시 머리를 식히면서 현실적인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큰 마음먹고 튼튼이에게 유명한 브랜드의 책을 사줘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은 사라졌고, 오히려 책 육아 및 아기 언어교육에 대한 철학이 또렷해졌다. 


내가 상담받은 모든 브랜드의 상품은 정말 멋있었고 전문적임에 틀림없다. 내가 돈에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면 이런 생각도 없이 이것저것 다 들여줬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약간 속상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아무리 돈 걱정이 없더라도 지금 내가 하는 엄마로서의 고민과 판단의 시간이 튼튼이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이라고 믿는다. 


아기에게 보여주는 것을 내가 골라준다는 것은, 아기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보고 배우는 중요한 과정을 나에게 맡겨진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과정을 소홀히 하지 않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고, 튼튼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튼튼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중심을 잡고 가고 있을 뿐이다. 


몇백만 원이 사실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과연 그 돈을 지출하였을 때, 흔히들 말하는 '뽕 뽑았다'는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이 글에 남긴 생각의 과정들이 필수불가결이다. 언젠가는 큰돈을 써서 전집을 들여줄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구매해주고 싶어서 메모해둔 유명 브랜드 전집도 몇 가지 있다. 두고두고 알아본 결과 특정 시기에 들여주면 효과를 크게 보는 검증된 책들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게 박람회를 다녀오는 길에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던 나의 (나름) 교육관과 철학에 대해서 스스로 정리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튼튼이가 요즘 좋아하는 까꿍책을 떠올리면서 아기들이 잘 보는 까꿍책을 검색해보았다.  또 튼튼이가 하루에도 열 번은 읽어달라고 하는 책의 출판사 스토어를 찾아가서 다른 베스트셀러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요즘 자동차 바퀴에 꽂힌 튼튼이가 좋아할 만한 바퀴 달린 영어 원서 책을 저렴하게 서점에서 구입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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