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공동묘지 옆에서 멈춘 이유는

by 전여래


결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 이 사람과는 결혼해도 되겠다.’ 싶은 자신만의 결정적 장면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처음 본 순간, 그 사람 머리 위로 반짝 켜진 형광등 100개가 순전한 감정의 영역이라면, 결혼해도 되겠다고 확신 하는 장면은, 거친 감정의 파도가 가라앉고 바다가 더없이 잔잔해진 상태에서 찾아오는 이성의 영역인 것 같기도 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관계에 대한 단단한 확신은 꼭 필요하다. 굳이 결혼으로 결론 맺지 않더라도, 앞으로 찾아올 오랜 시간을 이 사람과 함께 하게 될 것 같은 확신. 일시적 설렘과 두근거림을 뛰어넘는 ‘운명의 기시감’ 같은 것.


우리 부부는 극지방과 열대지방만큼이나 다른 사람이다. 한겨울에도 가끔 선풍기를 틀어야 하는 남편과 혹서기를 제외하고 사시사철 내복을 입어야 하는 나. 국에 손톱만 한 청양고추 한 조각만 들어가도 맵다고 난리 치는 남편과, 눈물 쏙 빠지도록 매운 낙지볶음과 닭발이 가끔 그리운 나. 여행은 게임 속에서 보는 판타지 가상 세계로 충분한 남편과, 하루종일 여행 다큐를 틀어놓고 침을 흘리는 나.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1가지 공통점과 35,784가지의 다른 점을 가진 부부다. (한 가지 공통점이 또 있긴 하다. 같은 호모 사피엔스 종이라는 사실)

이 엄청난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부가 되어 살고 있다. 사회과학 공부하러 모인 첫날, 불이 탁 켜진 순간부터 결혼을 꿈꾸었냐고? 천만에, 그땐 우리가 연인이 될 줄도 몰랐다. (내 전남친이 거의 연하이긴 하지만, 11살은 연애 가능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나이 차였으니)

내게는 두 장면이 있다.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리고, 나와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다른 사람이지만 이 남자라면 결혼을 해도 괜찮겠다, 정확히 말해 ‘결혼을 한다면 반드시 이 남자와 해야겠다.’ 마음이 움직였던 두 번의 순간.


첫 번째 장면은 어느 날 밤, 침대 맡에 쭈그리고 앉아 끅끅 울고 있는 내 모습으로 시작한다. 프리랜서 기고가로 일하면서 돈 되는 글은 닥치는 대로 쓰던 중이었다. 기업 사보, 대학 홍보집, 정부 부처 안내서, 스포츠신문의 연애칼럼…….

내가 쓴 글이 모종의 필화 사건을 겪고 뭘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남편 집 침대맡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훌쩍 울고 있으려니, 놀란 남편이 자다 깼다.

“왜 울어요? 응?”

서러움, 억울함, 쪽팔림이 범벅된 상태로 잉잉 울면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내 잘못이 8이라면 3 정도로 ‘살짝’ 낮추고, 남의 잘못은 잔뜩 부풀린 상태로. 쟤가 나 때렸어! 엉엉! 혼내줘! 엉엉!

자초지종을 듣는 남편의 얼굴은 어느새 -내가 참 좋아하는- 차갑고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남편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 나는 기대하게 된다. 나같이 즉흥적이고 변덕 심하고 감정 널뛰는 인간이 환생을 거듭해도 갖지 못할, 차가운 이성에 기반한 현명한 조언을 해주리라는 것을.

“당신 잘못이 더 큰 것 같은데요?”

남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신기하게도 설움과 억울함이 쏙 들어가고 마음이 후련해졌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느낌이랄까, 옷에다 쉬 했는데 남들 보기 전에 물 끼얹어준 느낌이랄까.

“어, 그,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헤헤.”

나는 남편을 통해 내가 남자에게 바라는 진짜 공감이 뭔지 깨달았다. ‘화성 남자, 금성 여자’ 식의 대화법 함정에 빠지지 말자. 여자는 무조건 남자의 공감을 바란다고? 남자의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감정적인 맞장구를 바라는 거라고? 개뿔, 여자는 뭐 그저 감정만 살아 날뛰는 어린애인가?

냉정하게 잘잘못을 따지며 여친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공평무사한 모습에, 처음으로 이 남자와 결혼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자기 객관화 덜 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인간에게는 가끔 예방주사 맞듯 따끔한 충고가 필요한 법이니까.


쐐기 박은 두 번째 장면은 겨울 제주 여행에서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제주의 겨울은 한라산, 한라산의 눈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것을.

제일 먼저 4.3 평화공원에 들러 참배하고 숙소로 향하는데, 안 그래도 그칠 기미 없던 눈이 그야말로 폭설로 바뀌기 시작했다. 렌터카 바퀴에 체인을 감고, 시야를 가리는 어마무시한 눈바람을 맞으며 중산간도로를 엉금엉금 기다시피 했다.

하필 산 중턱 숙소를 고른 게 문제였다. 밤은 속절없이 깊어가고 가도 가도 길은 끝나지 않았다. 눈과 오르막이 만나니 그야말로 최강 빌런이란 말이 딱이었다. 운전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타고난 침착함과 차분함으로 무사고 안전운전을 보장하던 남편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최대한 조심조심, 힘겨워하는 차를 달래가며 눈 쌓인 언덕을 올라가던 찰나, 우지끈!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춰 섰다. 체인이 끊어진 것이다.

숙소까지는 한참 남았고, 산속의 어둠은 깊기도 했다. 설상가상, 차가 멈춰선 곳은 하필 공동묘지 옆이었다. 공동묘지라니? 공동묘지라니!

어릴 때부터 귀신 이야기 엄청 좋아하고, ‘세상에 저런 일이!’ 류의 방송 즐겨보고, 한때 온갖 동서양의 오컬트와 미스터리에 탐닉하던 나는… 부끄럽게도 패닉에 빠졌다. 왜지? 왜 공동묘지 옆에서 멈췄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확신했다. 체인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끊어먹은’ 것이고, 뭔가 무시무시한 기운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거라고. 우리에게 엄청 무서운 일이 닥칠 것 같다고. 당장이라도 묘지가 열리고 시커먼 악귀가 튀어나와……. 엉엉, 무서워!

“괜찮아요. 눈이 너무 쌓여서 체인이 눈 무게를 못 견디고 끊어진 거예요. 공동묘지 옆에서 멈춘 건, 이 산에 묘지가 워낙 많은 탓이고.”

미친 듯 뻗어가는 내 패닉을 멈춘 것은, 언제나처럼 덤덤한 남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초자연과 미스터리로 날아가던 내 정신줄 현실로 끌어내려 주었다. 끊어진 체인은 물리 현상, 공동묘지는 지리적 특성.

다행히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고, 숙소에서 데리러 와줘서 우리는 무사히 제주 여행을 마쳤다. 눈과 어둠과 공동묘지가 내 허약한 멘탈을 두드려대던 그 밤, 남편의 덤덤한 목소리에 안심하며 생각했다. 이 남자와 결혼하면, 참 안심되겠구나.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그밤의 그 모든 자연이, 온 우주가, 나와 남편을 결혼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인 건 아닐까? 열심히 체인 끊고 영차 영차 공동묘지까지 차를 미는 귀신들을 상상해보곤 한다. 남편은 말도 안 되는 비과학이라며 코웃음 치겠지만.


(나중에 알았는데, 남편도 엄청 무서웠단다. 그런데 내가 너무 무서워하는 바람에 무서워할 기회가 없었단다. 이래서 뭐든 먼저 나서는 놈이 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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