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생존 가방 속에 뭐가 들었냐면요

by 전여래

혈액형, 별자리, 애니어그램의 뒤를 이어 이 구역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MBTI 얘기를 안 할 수 없겠다. (남편이 비웃을까봐 과학보다는 재미의 영역이라고 치부하면서 MBTI를 뭉개는 척했지만, 아니다. MBTI는 ‘절대과학’이다. 과학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정확할 리가!)

MBTI 분석에 따르면 남편은 ISTJ, 나는 ENTP란다. 성실함, 책임감 강함, 규칙과 권위 중시, 정직하고 신중하며 최대한 객관적이려 노력함, 준비성 철저하고 계획 없이는 집밖을 나서지 않는(못하는) 남편.

즉흥적, 충동적이고 새로운 것에 눈 뒤집히고 창의성이 뛰어나다지만 금세 싫증을 내며, 계획이고 나발이고 꽂히면 그것만 집중하고 호기심 끓어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가는 나.

둘 중 괴로운 건 단연 남편, 덕 보는 건 당연히 나다. 남편은 마누라의 준비성 없음과 대책 없는 즉흥성을 도무지 이해 못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생존 가방’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어딜 가든 반드시 챙기는, 육지거북 등딱지처럼 생긴 커다란 배낭을 나는 생존 가방이라 부르는데, 십 수 년을 같이 지내오면서도 그 가방 속에 뭐가 들었는지 다 알지 못한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남편의 생존 가방 속에 다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어디 보자, 대충 전자제품 덕후답게 노트북, 패드, 충전기들, 무선 이어폰, 보조 배터리, 휴대용 녹음기 등에서부터 밴드, 진통제, 상처 치료제, 소독약 같은 의약품은 물론이요 안경집, 안경닦이, 카드지갑, 그냥 지갑, 지폐가 한 뭉치 든 봉투(남편 어디서 노숙해?), 다이어리, 메모지, 접착테이프, 색색의 형광펜, 네임펜, 그냥 펜을 비롯한 각종 문구류, 칼, 가위, 반짇고리, 손톱깎이, 물티슈, 면봉, 가글, 치실, 치솔 치약(남편 어디서 노숙하해? 2), 헉헉…….

혹시나 싶어 물어보니,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모든 교과서를 가방에 넣고 다녔단다. 수업 시간표와 상관없이 전 과목 교과서와 참고서를 매일 매일! (아니 대체 왜 때문에?)

교과서, 참고서, 공책까지, 못해도 10kg은 훨씬 넘을 무거운 가방을 꾸역꾸역 메고 다녔을 남편을 생각하니 안쓰러워 눈물이 앞을 가리는데, 정작 당사자는 ‘언제 어디서 뭘 공부하고 싶어질지 모르니 전부 들고 다녔다.’면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반응이었다. (아이구, 그러문요. 니예 니예. 범생이 달리 범생이겠습니까요.)


가만 있자, 내 가방에는 뭐가 들었나 보… 어라, 나는 가방이 없네? 오른쪽 주머니에 휴대폰, 왼쪽 주머니에 신용카드 한 장이 끝이네? 헤헤.

이렇게 달랑달랑 다니다가 외투 갈아입을 때 신용카드 옮기는 일을 자주 깜빡하는 바람에 밤에 맥주 사러 편의점 갔다가 돌아오길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항상 낭패를 보면서도 다음에 또 그런다. 왜냐? 준비성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준비성이라는 이름의 유전자가 있다면 아무래도 그 유전자는 나를 비껴 남편에게 몰빵된 모양이지만, 나란 인간이 번번이 낭패를 보면서도 고치지 않는 이유는, 솔직히 말해 그래도 살 만해서다. 딱히 불편한 거 없고(산책 삼아 다시 갔다 오면 되지 뭐. 헤헤), 뭘 빠뜨렸다는 사실이 내 영혼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이 세상 모든 ISTJ랑 살아보지 않았기에 모든 ISTJ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남편에게 필요한 뭔가가 하나라도 빠져 있거나 준비가 조금이라도 덜 된 상황은 곧 멘붕이요, 아노미요, 세계 종말이다.


<필요한 물건을 빠뜨렸을 때 ISTJ와 ENTP의 반응>

남편 : 뭘 빠뜨렸다—>놀라고 당황스럽다. 가방 여기저기 최선 다해 뒤져본다. 그래도 없다.—>시간이 지날수록 괴롭다. 계속 곱씹고 자책한다.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다.—>이 상황이 지옥 같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걸. (네?)

나 : 뭘 빠뜨렸다—>어? 없네? 헤헤. (끝)


결국 준비성과 계획성도 그 차이에서 오는 게 아닐까? 스트레스를 받느냐 안 받느냐, 받는다면 얼마나 크게 받느냐의 차이. 나는 물건을 빠뜨리거나 잃어버려도 별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심지어 비행기가 대여섯 시간 늦게 떠도 그러려니 하는 인간이다.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뭘 그런 거로 스트레스를?

하지만 남편은 생존 가방에서 없어진 물건 하나, 사람들 앞에서 한 작은 말실수(남편 말고는 누구도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 하나, 계획에서 어긋나버린 10분에도 어마어마하게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최대한 준비하고 또 준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한 가지 일에 플랜A, 플랜B, 플랜C……. 최소 132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한다는 사실을 알고 어찌나 놀랍던지! (내가 치밀한 계획을 세울 때는 딱 한 경우, 여행 갈 때다. 여행 시작부터 끝까지 하루를 거의 초 단위로 쪼개 촘촘하고 세세한 계획을 짜서 측근들을 깜짝 놀래주곤 하는데, 그러는 이유는 딱 하나다. 재미있어서!)

남편은 이번 학기에 일주일에 3일 비대면 강의를 하는데, 모든 강의가 끝난 뒤 그야말로 며칠을 앓아눕는다. 강의 시간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준비하느라 영혼까지 끌어 쓰는 바람에. 논문 발표라도 할라치면 며칠 전부터 밥도 못 먹는다. 사람들 앞에서 실수할까 봐.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를 땐, 뭘 저렇게까지 애면글면 전전긍긍하나 싶어 혀를 차기도 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남편으로 하여금 생존 가방을 꾸리게 하고, 수십 개의 변수를 고려한 계획을 짜게 하고, 실수할까 봐 잠도 못 자게 하는 그 모든 행동 아래에는 ‘불안’이라는 기질이 넓고 깊게 깔려 있음을.

지나치게 불안이 많고 녹초가 되도록 늘 긴장 상태인 남편의 기질. 무척 힘들고 괴롭지만 그렇게 태어났으니 고칠 수도 벗을 수도 없는 기질.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그 기질이 가끔은 어이없고 때로는 귀엽지만 대개는 안쓰럽다.


남편을 통해 나는 누군가가 스스로의 결함이라 생각하는 기질을 이해하고, 그 결함을 감싸 안는 일이 뭔지 아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모름지기 연인이란, 부부란, ‘완전하지는 못해도 온전하게는 만들어주는 관계(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에서)’임을 알게 됐달까.

하여 남편은 지금도 생존 가방을 열심히 꾸린다. 결혼 전의 생존 가방이 불안과 긴장을 최대한 줄이는 일종의 자기 치유 행위였다면, 결혼 후에 쓰임새가 하나 늘었다.

덤벙대는 마누라를 구박하며 화수분 같은 가방에서 물건 하나씩 꺼내줄 때마다 남편의 덤덤한 얼굴에는 뿌듯함과 기쁨이 미세하게 퍼지는데, 그 표정을 자주 보고 싶어 나는 더더욱 안 챙긴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은 남편의 생존 가방 안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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