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다니는 남편의 여름방학에 맞춰 결혼식을 올린 뒤 6개월 만에 신혼여행을 떠났다. 역시나 남편의 겨울방학에 맞춰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돈 많은 부자 or 어디든 맘대로 갈 수 있는 초능력.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단연 후자다. 돈이 많으면 뭐든 할 수 있고 살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순간이동 능력에 비할까. (전용기를 사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순간이동 해버리면 출입국 절차도 필요 없는데요?)
서른 살 무렵 처음 해외여행에 맛 들인 후 지금껏 30개 나라를 여행했는데, 1년에 두세 나라를 부지런히 다니면 죽기 전에 전 세계를 다 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몹시 슬퍼진다.
패키지로 묶여 후루룩 도장 깨기 하면 숫자 늘리기야 어렵지 않겠지만, 좋아하는 나라는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다시 가는 성정 때문에 늘, 순간이동 능력이 절실하다.
아침에는 스리랑카 시기리야 궁전 꼭대기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고, 점심에는 칠레 이슬라네그라의 파블로 네루다의 집 난간에 걸터앉아 낮 맥주를 마시고, 저녁에는 케냐 세렝게티 국립공원에서 저녁놀을 보며 라면을……. 캬.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상을 시시때때로 하는 나였으니, 신혼여행을 얼마나 기대했을지는 당연지사.
그런데 기막히게도, 내 남편은 내가 아는 최고의 집돌이다. 하루 종일 틀어박힐 수 있는 방 한 칸, 컴퓨터와 온갖 기기들 올려놓을 책상 하나, 책상 아래 발 데워줄 찜질팩 하나, 구멍 많은 멀티탭 두어 개면 족하다. 틈틈이 먹을 거나 넣어주면 더 바랄 것 없는, 그야말로 21세기형 안빈낙도 무위자연의 삶이랄까.
가끔 내 남편이 불치병에 걸렸구나 싶을 때가 있다. 집 현관문을 열면 온몸에 두드러기 돋는 병, 밖에 나가 햇볕을 쬐거나 낯선 사람을 만나면 좀비로 변하는 병 같은 거 말이다.
이 집돌이가 어쩌다 드라이브를 가자고 나설 때가 있는데, 차를 운전한 지 최소 일주일쯤 됐다는 뜻이다. 가끔씩은 운전을 해줘야 블랙박스 배터리가 충전이 된다나 뭐라나.
코로나 시국은 누구에게나 지독한 괴로움인 줄 알았는데, 초내향형 집돌, 집순이들에게는 다른 ‘기회’일 수 있다는 것을, 남편을 통해 알게 됐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대놓고 좋다고는 못하지만, 합법적이고 당당하게 집에 틀어박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코로나 전에는 비사교적이고 사회성 떨어지는 은둔형 외톨이 취급에 눈물지었으나, 지금은 거리두기에 철저한 성숙한 시민이라며 스스로 뿌듯해하고 있는 내향형 집순이들 손들어보세요~)
남편은 지금 2년째 집에서 비대면 강의 중인데, 화상 강의를 핑계 삼아 안 그래도 최첨단을 달리던 장비들을 더더더 업그레이드하느라 바쁘기가 이를 데 없다.
작년에는 75인치 TV보다 비싼 와이드 모니터를 들이더니, 얼마 전에는 모니터 암인지 머시깽인지를 사놓고는 모니터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아주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그래요, 당신이 행복하다면 나도 좋아요. 정말이라고요.)
혹시 여행은 좋아하느냐고? 그럴 리가요. 익숙하고 편안한 집을 떠나 낯선 곳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지독한 스트레스인 사람에게 여행이라니,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를.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내 여행은 무조건 ‘나 홀로’이다. 결혼 전 마지막이라는 구실로 싱가포르도 혼자 다녀왔고, 결혼 1주년 기념으로는 가열 차게 제주도 올레길을 걸었다. 물론 혼자서.
코로나 터지기 몇 달 전, 운 좋게 태국-베트남-라오스를 돌고 왔는데, 역시 혼자였다. 자신이 집돌이라고 마누라까지 여행 못 다니게 하는 성질 고약한 남편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신혼여행도 따로 간… 건 아니고, 다행히 함께 갔다. 14박 15일 남태평양 크루즈. 그렇다. 우리는 신혼여행으로 유람선을 탔다. 거 왜 있잖은가, 미드 같은 데 가끔 나오는, 초대형 초호화 유람선.
은퇴하고 남은 생을 플렉스 해버리기로 작정한 서양 노부부들이 퇴직금 탈탈 털어 한두 달씩 노닥거리며 탕진잼하는 바로 그 여행!
아니, 무슨 신혼여행으로 인생 황혼기에나 어울릴 법한 크루즈 여행을 해버렸느냐고? 내 말이! 그런데 어쩌겠는가. 이승에서 남편과 내가 원하는 것을 함께 충족시킬 수 있는 여행은 오직 크루즈 여행뿐인 것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오지를 탐험하거나 최소 에베레스트 정도는 오르고 싶었던 나와 달리, 남편에게 신혼여행이란 ‘편안한 리조트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널브러져 있는 것’이었으니, 그 차이가 도무지 좁혀지지 않았다.
에이 씨, 차라리 따로 가? 하던 찰나 내 뒤통수를 강타한 것이 바로 크루즈 여행이었다. 바다에 뜬 동안은 배에서 꼼짝 않고 먹고 자고 놀 수 있으니 남편이 해피하고, 가끔 섬에 내려 몇 시간 기항지 관광을 할 수 있으니 아쉬운 대로 나도 좋고.
그리하여 우리는 호주 시드니에서 출발해 바누아투와 뉴칼레도니아를 들러 다시 시드니로 돌아오는 14박 15일의 남태평양 크루즈 여행을 떠났고, 승무원도 승객도 죄다 서양인이고 아시안이라고는 우리 둘뿐인 배 안에서 꿋꿋이 유람선을 즐겼다.
배 터지게 먹고(하루 24시간 먹을 수 있다. 물론 공짜로!), 방과 갑판에서 원 없이 바다를 보고, 쇼핑센터를 구경하고, 카드 게임을 하고, 각종 공연을 보고, 요가 강습을 받고, 놀다 심심하면 헬스장에서 런닝머신을 타면서 시간을 마음껏 흘려보냈다.
집돌이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여행이었지만, 돌이켜 보니 다시없을 기회였고 앞으로도 다시 만나기 힘든 귀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언제 또 다시 남태평양의 그 푸르고 너른 파도 위를 하릴 없이 흘러 다닐 수 있을까. 생활의 근심과 불안 따위 잊고 어린애처럼 커다란 배를 뛰어다니며 해맑게 웃을 수 있을까. 요즘 먼 여행이 고플 때면 바누아투와 뉴칼레도니아를 떠올리며 달래곤 한다.
아, 크루즈 여행에서 건진 것이 또 있는데 그건 바로 남편의 숨은 재능이다. 집에서는 하도 앉거나 누워만 있어 척추에 문제 있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나 타고난 춤꾼이지 뭔가!
줌바 댄스와 탱고 강습에서 남편은 숨겨 왔던 춤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마누라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집돌이가 집 떠난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정신줄을 놓은 건지, 낯선 사람 수백 명과 감옥, 아니 배에서 갇혀 지내다 보니 불안과 긴장이 빵 터져 버린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란한 남편의 춤사위를 보며 나는 굳게 결심했다.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크루즈여행을 꼭 다시 하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