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내향형 인간 vs 초외향형 인간

by 전여래

저어기 남녘, 커다랗고 활달한 바닷가 도시에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가 살고 있었어요.

한쪽 볼에 보조개가 쏙 패고 피부가 뽀얀 그 아이는, 말수 적고 수줍음이 많고 낯가림이 심했답니다.

그 아이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말을 걸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 몹시도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되도록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말도 조용조용히 하고 숨도 조심조심 쉬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유치원에서 보낸 알림장을 본 엄마가,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며 아이에게 준비물 값을 주시는 게 아니겠어요?

아이의 머릿속에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순식간에 그려졌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답니다. 준비물 값을 드리려면 선생님에게 가까이 가야 하고, 돈을 건네면서 선생님과 손이 닿을 테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볼 테고…….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쿵쾅대고, 얼굴은 뜨거워지고, 손에서는 땀이 나면서 숨까지 가빠졌어요.

바윗돌 같은 부담을 안고 천근 만근 무거운 발을 끌며 집을 나선 아이는 최대한 느릿느릿 걸었답니다.

그러나 유치원은 아파트 단지 안에 있어 집과 무척 가까웠고,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5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였어요.

드디어 유치원이 자리한 상가 건물이 보인 순간, 아이의 숨은 더욱 가빠졌고, 심장은 터져버릴 것 같았어요. 걸음을 멈춘 아이는 돌아가지도 나아가지도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어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으며 망연자실 서있던 아이는, 다섯 살 인생에서 가장 크고 위험한 결심을 하고 말았어요.

‘돈을 버려야겠어!’

결심을 끝낸 아이는 주저 없이 상가 쓰레기통으로 달려가 꼭 쥐고 있던 돈을 미련 없이 털어버렸답니다.

아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불러올 돈! 그 돈을 버리고 나자 아이의 마음이 거짓말처럼 편해지지 뭐예요.

돈이 없으니 선생님께 가까이 갈 일도, 아이들의 시선을 받을 일도 없겠지! 아이는 가뿐해진 마음과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유치원에 갔고, 구석에서 조용히, 무척 즐겁게 놀았답니다.


저어기, 또 다른 남녘의 눈 많이 내리는 산골 마을에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어요.

온종일 햇살 아래 뛰어다니느라 살결 까무잡잡한 그 아이는, 동네방네 거칠 것 없는 왈가닥이었답니다.

유치원 없는 시골 마을에 살았지만, 아이에게 유치원은 필요 없었어요. 눈 뜨자마자 집을 뛰어나가면 온 동네가 유치원이고 놀이공원이고 키즈카페였거든요.

들이고 산이고 시냇가고 아이가 뒹굴지 못할 곳은 없었고, 감나무 사과나무 닭장 싸리 울타리 어디든 오르지 못할 곳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친구들이 멀리서 놀러 오신다지 뭐예요. 지지고 볶으며 잔치 준비에 한창인 아침부터 아이의 가슴은 쿵쾅쿵쾅 세차게 뛰고,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어요.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 어른들이 주실 선물에 대한 기대로? 아니, 아니. 음식도 선물도 필요 없었어요. 아이를 설레게 한 건, ‘자랑할 수 있는 새로운 손님의 출현’ 그 자체였어요. 뭘 자랑하냐고요? 아이의 노래, 아이의 춤, 아이의 귀여움… 그 모든 것과 더불어 아이의 존재 자체를!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엄마 친구분들이 집에 도착하셨는데, 이걸 어쩌죠? 너무 오랜만에 만나 밀린 회포를 푸느라 손님들의 관심이 아이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지 뭐예요.

아줌마들의 화통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방밖에 쪼그리고 앉아, 이제나 저제나 자신을 불러 주기 기다렸지만 아무래도 아이의 존재는 잊힌 모양이었어요.

더 참을 수 없던 아이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방에서 제일 높은 재봉틀 위로 단숨에 올라갔답니다. 엄마가 결혼할 때 혼수로 해 오신 재봉틀 위에 올라선 아이가 뭘 했냐고요? 아이는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무아지경이 된 아이의 막춤에, 손님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어요. 다섯 살짜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님들 앞에서 춤을, 그것도 현란한 막춤을 추다니!

왁자한 웃음과 커다란 박수가 동시에 터져 나왔어요. 이야, 김00 딸내미 최고다! 최고!

손님들의 칭찬이 쏟아지자 아이는 흡족했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더더 열심히 춤을 추었답니다. 그날은 아이의 다섯 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날이 되었어요.


짐작했겠지만 부끄러워 돈을 버린 아이는 남편이고, 재봉틀 위에 올라가 춤을 춘 아이는 나다. 얼마 전 서로의 어릴 적 일화를 들은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게 부끄러워서 돈을 버려? 제정신이야?”

“어떻게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출 수가 있어요? 제정신이에요?”

활달하고 사교적인 엄마의 딸로 태어나 평생을 발랄한 외향형으로 살아온 나는, 남편을 만나고야 비로소 세상에는 ‘타고난 내향형 인간’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부끄럼 많고 주목받는 게 싫기로서니, 돈을 버리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전 세계의 내향형들이여, 이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남편 또한 나를 만나면서 세상에는 ‘타고난 무대체질’이란 게 진짜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단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대도 ‘내 멋진 모습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라며 재봉틀 위에 올라가 춤을 추는 아이가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남의 시선을 즐기고 주목받으면 힘이 나는, 전문 용어로 ‘관종’인 나. 누가 쳐다보면 두드러기가 나고, 칭찬이라도 받을라치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남편.

이렇듯 극단적인 내향형과 극단적인 외향형이 만났지만, 우리는 서로의 성향을 최대한 존중하며 살고 있다. 서로를 신기해하며, 때로는 이상하다고 놀리며. 그래도 어쨌든 외향형 최고! 외향형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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