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지나 ‘마등’의 길로

by 전여래

결혼한 지 꽤 됐는데, 우리 결혼의 장르는 여전히 멜로나 로맨틱코미디가 아니라 미스터리인 것 같다.

우리를 잘 모르거나,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열한 살 어린 남편의 나이가 미스터리이고, 우리를 잘 아는 이들에게는 ‘저렇게 다른 애들이 만나 저렇게 오래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스터리랄까.

하긴 나 또한 늘 신기하고,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아마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이 신기함은 여전할 것 같다.

창고에 처박아둔 이삿짐 박스에서 있는 줄도 몰랐던 물건이 끊임없이 나오듯, 우리 부부는 서로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게 있고, 새록새록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성격, 식성, 취향, 기질이 달라도 너무 다르고,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우리 부부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어쩌다 만난 걸까?


모든 것은 10여 년 전 봄, 한 신문의 자그마한 생활광고에서 시작되었다.

고주망태로 퍼마신 간밤의 술이 덜 깬 나는 기신기신 네발로 기어 화장실로 향했고, 변기에 앉아 술이 일렁이는 흐릿한 눈으로, 신문의 생활광고를 펼쳤다.

내가 신문에서 맨 처음 읽는 면이 바로 그 손바닥만 한 생활광고였다. 생일 축하, 부고, 벼룩시장 등 사람들의 소박한 이야기 보는 재미가 자잘하게 쏠쏠했으니까.

그런데 그날의 생활광고는 조금 특별했다. 사회과학 공부 모임에서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공고와 함께 <마르크스 경제학>이 눈에 확 들어왔다. 헐! 맑스 경제학을 가르쳐준다고?

나는 책장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자본>을 떠올렸다. 엄청나게 두꺼워서 꽂아놓으면 꽤나 폼나지만, 열어볼 엄두는 절대 안 나던 그 책.

나도 드디어, 어쩌면, 죽기 전에 <자본>을 읽을 수 있겠구나! 눈이 훼까닥 뒤집힌 나는, 신문에 나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나친 음주는 가뜩이나 흐릿한 판단력을 더 흐립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책 덮어버린 조기 수포자인데요, 저 같은 사람도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를 들을 수 있을까요?”

“아유 그럼요. 대학생, 교사, 주부, 시민단체 활동가 등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많이들 등록하셨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오세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모임에서 얻은 것은 자본 대신 남편이었다. 오리엔테이션 겸 첫 수업을 마치고 90년대식 호프집에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하는데, 남편이 일어서자 어둑어둑하던 술집에 갑자기 불이 탁 켜지지 뭔가. 불이 이제 들어왔나? 갸웃거렸던 그 날 그 순간이, 10여 년 지난 지금도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다.

결혼할 사람을 만났을 때 ‘불이 탁 켜진 것 같은 느낌’은 낡고 유치한 문학적 수사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그게 진짜였던 것이었던 것이었! (입틀막…….)

그 불 켜진 순간의 의미는 대수롭잖게 흘려버린 채 우리는 뒤풀이에서 조금씩 친해졌고, 집 방향이 같아 단둘이 지하철을 자주 타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말이 대화지, 말 많고 나이도 많은 내가 얼토당토않은 썰을 풀면 마음 여리고 어린 남편이 웃으며 맞장구쳐주는 식이었다. (유교 만세! 장유유서 만세!)

“님 대학 졸업하면 뭐 할 거임?”

대학 휴학하고 구청에서 공익근무 중이던 남편은 간간이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말하곤 했다.

“취업보다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데…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게 될 것 같아 고민이 많네요. 블라블라…….”

“에이, 뭐 그런 걱정을? 마등 하면 되잖음?”

“마등이… 뭐예요?”

“마누라 등쳐먹는 삶이지 뭐임. 깔깔깔.”

“……!!!”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금테안경 너머 작고 예리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심으로 놀라던 남편의 그 귀여운 표정.


지적이고 차분한 집안 분위기에서 변변한 일탈 한번 없이 초-중-고-대 일관된 범생이로 자란 남편은, ‘등쳐먹는’ 류의 상스러운 말을, 내게서 처음 들어봤단다. 그냥 등쳐먹는 것도 무서운데 마누라의 등을 치다니!

그런데 무서우면서도 은근 재미있더란다. (세상에서 범생이 꼬시기가 제일 쉬웠어요.) 내 등을 치라는 말은 아니었다. 등쳐 먹히는 대상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한 적 없다. 맹세코, 진심으로. (나이 차가 웬만해야 말이죠.)

나는 그냥, 늘 하던 대로 웃기고 싶어서 드립을 던진 것뿐이었다. 모름지기 진정한 낚시꾼은 매번 월척을 기대하며 낚싯줄을 던지지 않는다. 월척의 욕심은 내려놓고 그저 드리우고 또 드리우는 것이다.

유머꾼도 마찬가지. 먹히든 안 먹히든, 웃기든 못 웃기든 그냥 막, 던지고 보는 거다. 못 웃기면 어쩌지? 분위기 싸해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은 알 바 아니다. 그날도 나는 진지한 얼굴로 미래를 걱정하는 녀석을 웃겨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전까지는 왠지 노인 공경 차원에서 나와 어울려주었던 것 같은 녀석이, ‘이 누나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 생각한 첫 장면이 바로 이 ‘마등’ 일화였다니, 역시 사람은 일단 웃기고 봐야…….


그래서 남편은 20대에 새롭게 발견한 마등의 꿈을 이루었느냐고? 우애 좋게 번갈아 서로의 등을 치며, 가끔은 친 등에 파스도 붙여주며 우리는 호시탐탐 ‘남등’과 ‘마등’을 노리고 있다. 둘 중 하나만 벌면 되고, 그게 나만 아니면 된다는 갸륵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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