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e my diar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으는돌고래 Apr 02. 2017

디지털노마드는 직업이 아니다

3주간의 디지털노마드 실험기

3주간의 디지털노마드 실험기


작년 11월, 3주 동안 에콰도르에 다녀왔다. 누군가는 여러 나라를 돌 시간에 딱 한 나라에만 머물렀다. 그 한 나라도 다 본 게 아니다. 과야킬에서 일주일, 몬타니타라는 해안가에서 일주일, 그리고 바뇨스라는 산골 마을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갔는데, 달걀 세우기로 유명한 적도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게을러서 그랬던 건 아니다. 물론 조금 게으른 편이기는 하지만. 일하면서 여행하는 디지털노마드가 되고 싶었고, 그런 라이프스타일이 나와 맞는지 실험해 보고 싶었다. 당시에 나는 원고 두 개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두 달 동안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수필집을 써야 했고,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윤문 및 각색해야 했다. 일을 잔뜩 싸 들고 에콰도르에 갔다. 규칙을 정했다. ‘하루 최소 6시간은 무조건 일을 하자.’


오후에 서핑하고 싶으면 아침 일찍 일어나 글을 썼다. 오전에 그네를 타러 다녀오면 오후에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느 날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요가를 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몇 시간씩 산책을 하기도 했다. 밤에 잠이 안 오면 숙소 근처 노점 옆에 털썩 앉아 사장님들과 스페인어 연습을 했다.


Swing at the edge of the world, Banos, Ecuador


분주한 스페인어 선생님 겸 사장님 겸 말동무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낯선 풍경이 익숙해져 가는 게 좋았고,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되겠지, 디지털노마드


한국에 돌아와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뭘 준비해야 하는지, 실제 디지털노마드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찾아봤다. 국내외 웹사이트를 들락날락했다. 그런데 리서치를 하면 할수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이 디지털노마드로 살기 위해 파워블로거가 되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런 현상은 국경을 초월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길에 오르기는 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여행콘텐츠로 먹고살 꿈을 꾸며 웹사이트에 ‘비즈니스 관련된 연락은 여기로’ 식의 문구를 띄워 놓지만, 실상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영어를 가르치거나 숙박시설 등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들은 디지털노마드가 되고 싶은 노마드다. 노마드의 삶도 멋지긴 하다.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지만.


(노마드가 아닌) 디지털노마드가 되고 싶다면 본업을 갖는 게 중요하다. 히키코모리처럼 집에만 있어도 인터넷만 있으면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게 먼저다. 예를 들어 유명 영화감독이나 작가 같은 창작자가 되거나 프리랜서가 되거나 어느 회사에 소속된 재택근무자가 되거나. 그래야 디지털노마드가 직업이 아닌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이걸 깨달은 후에 제일 먼저 몸이 묶여야 할 수 있는 일들을 정리했다. 닥치는 대로 하던 일들도 콘텐츠 관련 업무를 제외하고는 전부 정리했다. 지금도 출근 없이 일하고 있지만, 아직은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 정도 보고 있다.



도피성 유랑의 종착점 사이버 게토


디지털노마드를 꿈꿨던 많은 젊은이가 사이버 게토에 갇혔다는 글을 읽었다. ('디지털노마드를 꿈꾸었으나 사이버 게토에 갇혀버린 젊은이들', http://santa_croce.blog.me/220967595470)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출발한 도피성 유랑의 결과다. 다니는 곳이 많으니 소셜미디어에 자랑하기는 좋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소셜미디어가 전부가 아니다.  


여행에 꽂혀 아무런 계획도 없이 디지털노마드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온갖 여행 관련 강의와 경험담에 부추김을 당한다. 일단 떠나고 보라는 분위기에 여행을 다녀오면, 그중 운이 좋은 사람들은 책을 내고 강연 같은 걸 한다. 물론 그 또한 개인의 선택이고, 엄청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달라서인지 그들의 얘기에 크게 공감은 안 간다.  



디지털노마드는 삶의 방식이지 직업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디지털노마드가 되고 싶다고 하면 마냥 떠돌아다니고 싶어 할 거라 착각한다. 아직 나를 잘 몰라서 그렇다. 나는 쉼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체력이 좋지 않고, 가상공간 안에 모든 인간관계를 가두고 싶지도 않다. 소설 ‘80일의 세계 일주’에 버금가는 발도장 찍기식 세계 일주는 원해본 적도 없고, 여행으로 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없다.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지 않고, 해가 갈수록 나의 일을 더 잘하고 싶다.


디지털노마드의 장점은 원한다면 언제든 새로운 환경에서 일상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년 내내 아무 데도 안 갈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동네를 만나면 계획보다 오래 머물러 볼 수도 있다. 그래도 1년에 3개월 이상은 한국에 머물고 싶다. 오랫동안 같이 늙어갈 친구들이 있는 게 좋고,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는 게 좋기 때문이다. 혼자 노는 걸 좋아하지만 지속적인 관계망이 없는 삶은 통째로 가짜인 것 같아서 싫다.


이런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며 변할 수 있다. 삶에 대한 고민이 하루 아침에 끝날 수는 없으니까. 변하지 않을 건 하나다. 나에게 디지털노마드는 삶의 방식이지 직업이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언니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