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이상을 한 분야에 있어 온 사람들과의 만남
강사는 등단한 시인이자 잔뼈 굵은 에디터였다. ‘나는, 시간이 어디로 사라진다고 생각했었다.’ 이 문장에 꽂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글쓰기 강좌에 등록했다. 수업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정말 글을 못 쓰는구나.’ 이전에는 빨리 쓰면 잘 쓰는 건 줄 알았다. 수사를 쓰는 데 거침이 없었고, 고민 없이 고른 단어들이 난잡하게 배열됐다. 박언니의 글은 내 글과 완전히 달랐다. 정교했고 사려 깊었다. 편하게 읽혔지만, 결코 편하게 쓰지 않았을 거라는 게 느껴졌다.
회사 일로 수업에 못 나가게 되면서 박언니를 볼 일도 없어졌다. 박언니를 다시 기억해 낸 건 에콰도르에서였다. 수많은 남미 여행기를 읽던 중 낯익은 문체를 발견했다. ‘박언니 글 같은데’ 싶어 스크롤을 올려 보니 진짜 박언니의 이름이 있었다. 페이스북에서 박언니를 찾아냈다. 차 한잔하고 싶다는 말에 박언니는 흔쾌히 그러자 했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며칠 전 박언니의 작업실을 찾았다. 남미여행을 같이 다녀온 사람들과 운영하는 거라고 했다. 거실에 놓인 큰 테이블에 앉았다. 박언니는 원고 마감 때문에 바빴다. 걸려오는 전화에 이렇게 애먹은 적이 없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작업실의 또 다른 주인 홍언니가 합석했다. 홍언니는 10년 차 에디터라고 했다. 10년 이상 한 분야에 종사한 사람들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홍언니가 대단해 보였다. 정신 없는 박언니 대신 홍언니와의 대화가 길어졌다.
작업실 방문 세 시간을 지날 즈음, 김언니가 나타났다. 그녀도 10년 이상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그 사이 박언니는 일을 마쳤다. 진이 빠져 보였다. 세 언니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각자의 책을 쓰고 있었다. 글쓰기 전에 오픈회의를 한다고 해서 동석했다. 하고 싶은 게 많아 보였고,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실행할 능력도 있어 보였다. 직장생활을 착실히 하고있는 친구들이 종종 묻는다. “넌 어떻게 계속 하고싶은 게 있어?” 그 친구들이 회의자리에 같이 있었다면, ‘너보다 더하네’라며 혀를 내둘렀을 거다.
충격이었다. 한 분야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도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다니. 활발하게 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새로운 걸 하고자 하는 열망이 큰 것 같다. 주변에서 ‘그만큼 했으면 됐어’ 해도 멈추지 않는다. 우디앨런도 그렇다. 노감독은 본인의 작품 ‘로마위드러브’ 에 나와 은퇴는 곧 죽음이라며 업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언니들도, 안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10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그날 열감기 때문에 매우 아팠다. 차만 잠깐 마시고 나오려고 했는데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작업실을 나섰다.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언니들 앞에서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한 것 같다. 몸이 아파 정신이 없어서였는지, 언니들의 에너지에 혼이 나가서였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세 언니들로부터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 본인의 업을 오랜 시간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너무 나대며 사는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하나를 해도 제대로, 보이는 것에 흔들리지 말고 중심 잡힌 사람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