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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돌고래 Apr 15. 2017

테니스 칠 사람? (Blow-Up, 1966)

The "Blow-up" Game, by Roger Ebert

* blow up은 사진을 확대한다는 뜻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영화가 한국에는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들어왔습니다. 로저 에버트는 영화를 조목조목 뜯어보려는 대중의 모습을 사진을 확대해 진실을 알아내려 했던 주인공에 빗대려 평론 제목을 The "Blow-up" Game 이라고 한 듯합니다. 흐름을 깨지 않기 위해 부득이하게 '욕망' 대신 원제 'Blow-up'을 썼습니다.


이건 당신이 어디서든 접할 법한 게임이다. 매우 많은 사람이 'Blow-Up'을 봤고, 그들 중 대부분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해해야 하는 영화는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하루는 남편 손에 이끌려 'Blow-Up'을 본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다. 데이빗 헤밍스가 나온다는 말에 혹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영화가 굉장히 심오한 것 같긴 한데, 제가 요점을 놓친 거겠죠?”


“네.”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겠나.


어떤 사람들은 “물론 잘 찍은 영화긴 한데, 의미가 없네” 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지쳐서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네가 맞아. 하지만 아무 의미 없다는 게 이 영화가 말하려는 거야.”


반면 Blow-Up 게임에 심취한 사람들과 씨름하게 될 수도 있다. 그들은 'Blow-Up'을 일곱 번씩 본 사람들로 날카로운 전문가들이다. 영화에 테니스 게임이 두 번 나온다는 것은 기본이고 데이빗 헤밍스의 짧은 혼잣말들까지 줄줄 꿰고 있다.   


이들 중 대다수가 'Blow-Up'에 실제 살인사건이 있었다고 착각한다. 동의하지 않으면 그들은 으르렁댄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살인이 없던 일이라고? 살인이 없었다면 왜 시신이 나오겠어!”


조금은 당혹스러운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할리우드 작가들에 의해 영화 속 이야기가 실제 삶에 일어날 수 있다고 세뇌당해 왔다. 당신 손에 시신이 들려있다면, 정말 당신이 살인한 걸까?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영화는 감독이 만들어 낸 이야기다. 감독은 카메라로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다. 감독이 뛰어나다면, 관객들도 좋아할 만한 것들을.


골동품가게에서 나온 헤밍스는 회색 머리 남자와 공원으로 걸어가는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를 본다. 오래된 테니스장을 지나고 아스팔트를 올라 잔디를 가로지르며 헤밍스는 그들을 천천히 따라간다. 그리고 그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다시 그들을 관찰한다.

멀리 떨어져 사진을 계속 찍는 헤밍스


하지만 안토니오니(감독)은 그리 멀리 가지 않는다. 그는 남자의 팔을 활기차게 끌어당기는 바네사를 클로즈업 한다. 그리고 100야드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여러장의 사진을 찍는 헤밍스에게로 돌아온다.


바네사는 돌아서서 헤밍스를 본다. 그녀는 남성을 남겨두고 헤밍스를 향해 달려온다. 우리는 헤밍스가 확대한 사진들에서 이 모든 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헤밍스의 관점에서 상황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그 순간, 안토니오니는 헤밍스에게 달려가는 바네사를 향해 있는 회색 머리 남성을 뒤에서 가까이 잡는다. 남성은 본인의 발로 서 있다. 전혀 시체 같지 않다.


후에 헤밍스는 확대한 사진을 보며 남성 반대편 수풀에 누군가 총을 들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진에서는 바네사가 총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사진에서는 땅에 사람 몸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헤밍스가 확대한 사진에 누군가 총을 들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헤밍스는 암실에서 더 많은 확대본을 인화한다. 공원을 찾은 그는 시체를 목격한다. 그리고 스튜디오로 돌아와 사진들이 다 사라진 걸 발견한다. 다음 날 아침, 공원을 다시 찾았지만 이미 시체는 사라진 후다. 헤밍스는 테니스 코트로 걸어 내려간다. 거기에 지프를 타고 자축 중인 대학생들도 있다.   


대학생들은 공 없이 판토마임 테니스 게임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휙휙 발소리만 들린다. 상상 속 공이 코트를 넘어가자 헤밍스는 공을 돌려주는 척하며 게임에 참여한다. 그때 카메라는 게임장으로부터 멀어져 헤밍스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다. 그리고 테니스공 튀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헤밍스가 공 던지길 기다리는 대학생들


안토니오니는 짖궂다. 테니스공 소리를 듣는 건 누굴까? 학생들? 헤밍스? 아니면 관객? 불쌍한 헤밍스는 이제 뭘 믿어야 할지 모른다. 그는 30초 후에 사라질 것이다. 안토니오니는 카메라를 하늘 위로 쭉 당겨 잔디 위에 있는 작은 헤밍스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 슉! - 그가 사라진다.

헤밍스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계속 뭔가가 사라지는 영화에서 마지막 사라지는 장면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다. 안토니오니는 그가 자신의 영화 속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영웅도 사라지게 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사진은? 사진이 살인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그럴 수도 있지만, 헤밍스의 사진에 재밌는 점이 있다. 처음에는 완벽하게 보기 좋은 공원 사진이 확대할수록 선명도가 떨어진다. 헤밍스가 마침내 최대치로 사진을 확대했을 때, 그 사진은 수많은 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예술가 친구가 그린 불만족스러운 그림처럼.


살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Blow-Up’ 전문가가 계속 물어온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헤밍스의 카메라는 살인을 포착했고, 안토니오니의 카메라는 하지 않았어요.” 이 차이는 미묘한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영화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안토니오니는 ‘Blow-Up을 확대하면 할수록, 덜 이해하게 될 거예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안토니오가 현대 생활의 비현실성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진실을 아는 데 있어 미디어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사진 혹은 영상이 찍히거나 방송을 타거나 신문에 실리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말이다.


안토니오니는 미디어가 진짜 사건은 다루지 않으면서 없었던 일은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그의 사진가처럼, 우리도 실제 상황 앞에서는 미디어의 도움 없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거라고.


이 모든 게 허튼소리일 수도 있지만, 이게 Blow-Up 게임이다. 우리는 이야기 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복잡한 영화를 만드는 안토니오니 같은 감독에게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쉬운 답을 원한다면, Blow-Up 게임을 막 시작해 열정적으로 나서고 싶어했던 사람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


“덤불 속에 있던 사람은 총 든 남자가 아니었어요. 안토니오니가 다른 각도에서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거죠.”


테니스 칠 사람?


원문링크: http://www.rogerebert.com/rogers-journal/the-blow-up-game


: 로저에버트(1942-2013)는 비배우로는 유일하게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오른 영화평론가다. 최초로 영화 저널리즘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받았다.

: 로저에버트를 공부합니다. 원문을 토대로 번역했지만 제가 이해하는 대로 정리한 것이다 보니 빠진 부분 혹은 의역된 부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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