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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박사 Jun 14. 2020

조교가 알려주는 영어 학술적 글쓰기

숙련된 조교의 시범이 있겠습니다.


조교 생활의 꽃은 단연 채점입니다. 저를 비롯 수많은 조교들이 매월 보름달이 뜨면 정수를 떠다 놓고 빌며 오지선다형 객관식 시험 출제를 간절히 소원함에도 불구하고 절대 대다수의 정치학부 시험과 과제는 학생들의 논리적인 주장 전개와 글쓰기 훈련을 위해 에세이 형식으로 출제됩니다. 


대부분의 시험과 과제는 교수님의 참관 아래 조교들이 어느 수준의 답안이 '평균'인가를 가늠하는 이른바 '벤치마킹' 세션을 거친 후 대부분 조교들의 손으로 점수가 매겨지게 됩니다. 교수님들은 길이가 길고, 장기간의 자료조사로 만들어지는 대학원생, 그리고 4학년 세미나 과제를 주로 채점하시기 때문에 4학년 아래 학급의 학부 과제는 조교들의 손으로 이뤄진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보통 100명 정원 강의의 경우 조교당 40-50명분의 과제를 채점하는 정도입니다. 과제 하나당 20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물론 실제 채점하는데 드는 시간은 할당 시간의 몇 배가 들어갑니다. 약간 삥 뜯는 거 같다는 느낌이 조금 드는데, 아마 제 기분 탓일 겁니다.

1학년 정치학 개론 역할을 하는 과목의 기말고사. 두 질문에 모두 답해야 합니다. 강의 내용 응용이라 어려운 수준은 아닙니다.


토론토 대학교 정치학부는 상대평가를 폐지한 대신 에세이 과제의 평균 학점을 100점 만점에 67-72점 (C+~B-)을 기준으로 맞추고 있습니다. 학생들 고생을 덜어준다고 몇 년 전에 상대평가를 폐지했는데 평균 점수 범위를 지정하고 있으니 이게 뭔 조삼모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조교는 까라면 까야합니다. 


그럼 코스를 듣는 학생들 중 절반이 씨쁠을 받는다는 소리인데, 생각보다 참 점수가 낮지요? 저도 씨쁠 받은 아이들에게 "괜찮아, 평균이잖아. 우리 다음에 더 잘해보자고요 ㅎ_ㅎ" 하며 어르고 달래 돌려보냅니다만, 제가 봐도 기분이 썩 좋은 점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A, B를 받을 글이 C를 받는 게 아닙니다. C를 받은 에세이는 모두 제각각 그 점수를 받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진단하기로는 많은 학부생들이 학술적 글쓰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대학교에 입학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생각합니다. 채점하는 입장에서 영어를 능숙하게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보다, 학생들이 글을 어떻게 쓰는 게 제대로 쓰는 건지 모르는 문제가 더 커 보이거든요.


문제는 학부생들은 자기들 나름 고등학교 시절 날렸던 애들이 대학에 오기 때문에 본인들이 대학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왜 나는 씨쁠을 받을까, 왜 노력만큼 글이 나오지 않을까 고민하는 학생들이 아주 많습니다. 보통 1-2학년 과목 조교를 하다 보면 "나는 내가 글을 아주 잘 썼다고 생각하는데, 왜 내 점수는 이 모양입니까" 하며 찾아오는 학생들이 꽤 됩니다. 그냥 찾아오면 모를까, 자기 스스로 답답해 화를 내는 아이들도 있고, 제 앞에서 우는 아이들도 있었답니다. 아니 선수들끼리 왜 그래;; 하는 난감함을 넘어 개인적으로 안타깝습니다. 저도 학부시절 글쓰기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었거든요.


고로, 제 글을 찾아 읽으시는 학우들은 이런 답답함을 좀 비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학부 애기들에게 전해주는 글쓰기 초식을 비기만 짚어 모아봤습니다. 


오밤중에 조교가 어흥- 하고 물어가도 이 세 개만 기억하면 걱정이 없습니다.




짧고, 쉽고, 간결하게


영문으로 글쓰기를 할 때 휘황찬란한 문구와 GRE 기출문제에서나 가끔 볼 만한 단어를 들이붓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왠지 '저급 영어'와 '고급 영어'를 구분하고, '고급 영어'를 쓰는 게 더 좋은 영어를 구사하는 거라는 인식이 퍼진 듯한 아시아권 학생들이 이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글이란 물건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기 위해 쓰는 것이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주고 싶으면 제일 읽기 쉬운 문장과 제일 간단한 단어를 사용해 글을 작성해야 합니다. 난해한 내용을 주제로 하는 학술적 글쓰기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화려한 어휘는 글 읽는데 사나흘을 보낼 수 있고 사색을 즐길만한 여유가 있는 정년 교수 유한계급에게 양보합시다.


보통 괜히 복잡하고 어려운 단어를 쓰는 학생들은 대체적으로 그 단어가 실제로 무슨 뜻인지 잘 모른 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급진 표현을 찾겠다고 '시소러스(thesaurus)'라 부르는 유의어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 끌어넣으면 이런 사태가 빈번히 발생합니다. 뜻을 잘 모르는 난해한 단어를 쓰는 것보다 자기가 잘 아는 쉽고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를 쓰는 게 뜻 전달에 훨씬 더 효과적인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마지막으로, 글은 간결해야 합니다. 길게 줄줄 늘어뜨린 영문은 잘 쓰기도 어렵고, 읽기도 힘듭니다. 저는 가르치는 애기들에게 마치 친구와 다투듯 "짧고 싸가지없게 (concise and bitchy)" 글을 쓰라고 종종 얘기해줍니다. 배배 꼬인 문장보다 직설적으로 나가는 글이 읽기 더 쉽거든요. 


에세이를 읽는 조교의 표정이 이렇게 바뀌면 망하는 겁니다.


가끔 이렇게 말해줘도 자기 글엔 문제가 없다는 둥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에겐 "지금 너 에세이를 14살 먹은 너 조카에게 쥐어주면 어떻게 될까? 걔가 이 글을 이해할 수 있을까?"하고 물어봅니다. 저는 초등학생, 중학생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쉽게 풀어쓴 글이 제일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세이는 구조로 시작해서 구조로 끝난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읽혀야 하는 만큼 학술 에세이는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도 빨리 넘겨읽고 그 핵심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일정한 구조를 따른답니다. 일정한 구조를 따르지 않으면 천천히 정독을 해야 하니 글 읽는데 굉장히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지요? 


소설이나 산문이라면 모를까, 학술적 글쓰기는 난해한 주제를 다루기 땜시롱 그런 글은 사람들이 안 읽습니다(...) 저만 해도 이해하기 힘든 학술지는 "뭐 이딴 글이 다 있어" 하며 패스할 때가 많습니다. 글은 읽히기 위해 쓰인 물건이니, 저자는 본인 글이 최대한 많이 읽힐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에세이는 1) 에세이 전체를 관통하는 주장(thesis statement) 밝힌 뒤, 2) 주장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나열하고 (argumentative roadmap), 3) 주장을 조리 있게 전개 (아래 참조) 한 다음, 4) 이 주장이 새로이 밝혀내는 내용과 주장을 다시 한번 요약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discussion and conclusion).


에세이에 구조가 있는 것처럼, 에세이를 구성하는 각 문단도 구조가 있답니다. 한 문단의 시작은 그 문단이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을 요점만 잘 정리한 첫 문장(topic sentence)으로 시작하고, 문단의 대부분은 그 첫 문장의 내용 뒷받침하기 위한 여러 근거와 분석을 제시합니다(evience and analysis). 그리고 문단의 마지막은 그 문단이 주장한 내용을 다시 요약하고, 가능하다면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는 문장을 사용합니다 (conclusion and, if possible, transition)


학부 애기들을 가르칠 때 이 부분에 도달하면 "하지만 만두박사군, 우리가 수업을 들으며 읽는 학술지는 이런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는 글들이 많잖아? 어떻게 된 일이지?" 하며 되묻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도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면 난장판이 됩니다. 그만큼 정치학계가 더 쉽고 간결하게 글을 쓰는 노력을 게을리 한 경향이 없잖아 있습니다. 


근거 제시. 출처 명기


이건 뭐 기본 중 기본이죠 ㅎ_ㅎ 학술적 글쓰기는 출처를 명기하지 않으면 심각함의 정도에 따라 적게는 그 근거를 없는 것으로 취급(감점사항) 하지 않으면, 크게는 표절(인생 피곤해짐)로 보기도 합니다. 출처를 명기하는데 게으른 에세이는 아무리 잘 써도 C학점을 넘을 수 없습니다. 학교마다 다르지만, 토론토 대학교 정치학부는 사용하기 제일 쉽고 간단한 Chicago Citation of Style을 주로 쓴답니다.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이런 짤을 만들어 보내 주의시키기도 하는데.. 별 효과는 없었습니다.


원문 출처를 정리하고 출처 명기를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Zotero, Mendeley 등 앱을 쓰기도 합니다만, 노템전에서도 꼼꼼히 글을 점검하기만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답니다. 저도 멘델레이는 박사과정 들어와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마치는 글 - 무공 수련하듯, 글쓰기 수련은 조교와 함께


몽골인들처럼 엄마 뱃속에서 말 타는 법을 배운 채 태어나는 경지가 아닌 이상, 처음 해보는 것을 첫 빠따부터 잘 해내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겁니다. 영어 학술적 글쓰기도 마찬가지랍니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늘어나고, 읽으면 읽을수록 남이 어떻게 쓰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본인보다 더 먼저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게 글을 보이고 조언을 얻을수록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답니다.


제가 학생들을 편애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가르치는 애기들에게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조교와 접촉이 잦은 학생들이 접촉이 뜸한 학생들보다 대체적으로 학점이 현저히 높은 편입니다. 실제로 과제를 채점하고,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들에게 조언을 얻은 학생들이 더 가파른 성장을 하는 것이겠죠.


고백건대, 이 글은 학교에 상주하는 조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주저하는 경향이 있는 한국인 학생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한국인 학생들은 다른 나라 학생들보다 조교를 찾아가는데 주저하는 경향이 잦습니다. 과제를 돌려주며 점수 얘기 같이 좀 하게 찾아오니라- 얘기를 해 줘도 안 옵니다. 그리고 안 오는 만큼 위와 같은 (어쩌면 기초 중 기초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을 놓쳐 기대에 못 미치는 점수를 득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로, 영문 글쓰기가 마음대로 안돼 마음고생이 심한 학우들은 위에 간략히 적은 팁을 읽는 것에 그치지 말고 본인을 담당하는 조교들에게 마음껏 도움을 요청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도 영어로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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